꿈
작가, 예술가, 화가, 건축가, 음악가, 철학가, 문학가, 소설가, 연출가 다 멋진 말이지만,
정치가, 법률가, 사업가, 기업가, 과학가, 공학가, 연구가, 발명가 이것보다 낭만적이긴 하지만,
의사, 교수, 판사, 변호사, 배우, 장교, 회사원, 이사, 사장, 회장, 계장, 검사, 과장, 목사, 스님, 비구니, 수녀, 장로, 군인, 대리, 사원 이것보단 근사하게 들리긴 하지만,
사막을 달리는 알 수 없는 사람과
바람을 맞고 항구 둑에 걸쳐 앉은 아이와
산을 정처 없이 오르는 나그네와
강에서 미역을 감는 여인과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어부와
거리의 태양에 시력을 잃은 이름 모를 사람과
들판을 가로지르는 소녀와
고물 차에 발 기대고 잠들은 남자와
도시를 배회하는 청년과
삶을 싣고 달리는 집시 처녀와
헤아릴 수 없이 한 점을 만드는 사람들만큼 유혹적이진 않다.
한 가문 이룬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X 家 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꼭 욕같이 들린다.
그림을 봐도 글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건물을 보아도
한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선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시간을 들여서 머릿속 집을 뒤져야만
꽁무니를 뒤좇고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려야만
그렇게 한참을 공들여야만
겨우 손가락 크기도 안 되는 그 사람을 볼 뿐이다.
그가 말한 것을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남들에게 이해한다고 입 발린 소리로 말하며
텅 빈 머릿속으로 진심을 감추었지만
돌아서서 가만히 거울을 보면 그런 입이 부끄러울 뿐.
이름은 기억해도 한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다시 보려면 기억의 책장을 훑어내려야 하는 것
서둘러 곱씹고 되새기며 노력해야 하는 것
그래서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반갑게 웃는 것
보면서도 정작 그를 보지 못하는 것
그런 무감함이 돌아선 나의 뺨을 때리는 것
그리고 몰래 울게 되는 것
숨죽여서 열만 받게 되는 것
그래도 저 사람들이라도 보고 싶은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창공에다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
그러기 힘든 것
그런 게 답답한 것
비어버린 이 손조차 허무한 것
지금은 이런 사람들도 가까이 볼 수 없지만
살기만 하고 숨만 쉬는 식물인간들만 보곤 있지만
아픔에 절어 살려달라고 다리만 붙잡는 환자들만 보고 있지만
잘못했다며 미안하다며 울부짖는 수형자만 보고 있지만
하루를 달래지도 못하고 바닥에 누워버린 기계들만 보고 있지만
나도 그런 식물인간으로 멍하게 서 있곤 하지만
언제쯤 달려가 뜨겁게 이 사람들을 안아볼 수 있을까
매일같이 널브러진 삶
벽에다 치대면서 부딪쳐 버리는 삶
들리지 않고 보지도 못하는 무감한 삶
목마른 연민에 붙들려 가면을 써버린 삶
이런 거 버리고 이 한 사람 만들며 살고 싶다.
가슴이 솟구칠 때 가까이 보이는 거 아무거나 붙잡고 그걸 바라보고 싶다.
가슴이 무너질 때 만질 수 있는 거 아무거나 붙잡고 그걸 느끼고 싶다.
가슴이 무감할 때 온기를 채우는 거 아무거나 붙잡고 그걸 만지고 싶다.
가슴이 아파할 때 닦을 수 있는 거 아무거나 붙잡고 그걸 토하고 싶다.
가슴이 흘러갈 때 보낼 수 있는 거 아무거나 붙잡고 그걸 띄우고 싶다.
가슴이 너울질 때 버릴 수 있는 거 아무거나 붙잡고 그걸 맛보고 싶다.
저 태양이 물들어갈 때 그냥 잠들어가고 싶다.
저 하늘이 잠들었을 때 그냥 잠들고 싶다.
저 바다가 잠들었을 때 그냥 잠만 자고 싶다.
저 산맥이 잠들었을 때 그냥 잠을 청하고 싶다.
저 사막이 잠들었을 때 그냥 잠을 누이고 싶다.
저 거리가 잠들었을 때 그냥 잠을 베고 싶다.
그래서
잠든 입가에 웃음이 지고
잠든 눈이 눈물 흘리고
잠든 코가 숨을 쉬고
잠든 손이 허공을 지르고
잠든 발이 자갈길을 달리고
잠든 몸이 하늘을 날고
잠든 귀가 음악을 듣고
잠든 가슴이 소리를 내고
잠든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가슴이 터지는 대로
가슴이 말하는 대로
가슴이 토하는 대로
가슴이 속삭이는 대로
암말 없이 그렇게
날 내맡기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언제쯤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는 할까.
오늘은 내 꿈, 닿지 않는 내 꿈을 본다.
어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분노를 잠시 지우고
슬픔도 잠시 지우고
아픔도 잠시 지우고
서글픔도 잠시 지우고
잠시 그렇게 내 꿈을 그린다.
언제쯤 그곳에서
날 재울까
날 눕힐까
영원히 잠들까.
2004. 8. 28. SATURDAY
명백히 독립된 색깔의 자아로 현실이 요구하는 사회성을 발휘하는 일상이 펼쳐진다. 욕망이 들끓는 성질을 숨기며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형태로 살아가기란 침묵의 인내를 요한다. 이기적인 본성에 비해 삶은 이타적이고 헌신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려놓기 위해 내가 소망하던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시간을 향해 욕망하는 것들은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꿈을 꾸었다. 주전자 뚜껑을 열자 부주의하게 엎질러진 물은 호수로 변해 강으로 흘러들어 갔다. 물과 부딪히며 앞을 향해 유영하는 움직임은 가늘고 길었다. 커다란 굉음이 귓가로 스며들면서 격렬한 진동이 밀려왔다.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할지 주춤거렸다. 문어의 빨판에 흡착되듯이 빨려드는 물의 흐름 속에서 무지개색 광속이 눈을 어지럽혔다. 소용돌이치는 물거품이 회오리가 되어 몸을 얽어매었다. 손발이 반항할 수 없도록 단단해진 물줄기는 긴 원형의 통로를 지나 아득한 어둠 속에 머리와 발끝까지 통째로 밀어 넣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는 그렇게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