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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CREAM

<절규, 에드바르트 뭉크> 파괴된 세계

by CHRIS
[Skrik, Der Schrei der Natur, Edvard Munch, 1893, National Museum of Norway]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8월 24일에 적은 글이다.


단체가 만들어놓은 제도에 순응하면 과연 개인의 생각은 더 자유로워지고 행동의 제약은 사라질 수 있을까?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정상적인 사고는 정지해 버린 지 오래다. 뉴스에 올라오는 소식이 소설 속의 이야기 같으면서도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책장에서 빠져나온 듯한 사람들이 천이나 부직포 조각으로 입을 가리고 걷고 있다. 무해하도록 숨 쉬는 것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미덕이 되어버린 2020년 8월은 바이러스라는 소리 없는 비명이 귓가의 공기를 차지하고 있다.

텍스트와 그림들이 눈이 들어오지 않게 된 것은 무엇을 새롭게 시작할 때부터였다. 내 안의 것을 끌어낸다는 것, 다른 이름의 만들기(Making)는 이미 만들어 놓은 과거의 형태를 파괴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더불어 앞으로 달려가던 걸음을 멈춰야 한다는 명제를 안고 있었다. 방향을 전환하는 움직임에는 정지가 필연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망각의 샘에서 한 모금 물을 마신 듯, 나는 너무 쉽게 파괴의 길로 들어섰다. 누군가를 인터뷰하면서 왜 현재의 일을 하는지 물었을 때 더 이상 타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했어야 했다. 그리고 '자유', '기쁨', '구속', '절망'과 같은 단어들이 얼마나 개인적인 감정과 소망, 바람을 함유했는지, 얼마나 보편성을 상실한 것인지 잊지 말았어야 했다. 심통과 거짓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주변을 검은 밑바탕으로 덧칠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세계는 앞으로 걸어갈수록 '정상(Normal)'이라고 불리는 형태나 개념을 바꿔버릴 것이다. 어쩌면 나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의 《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 1844》 속에서 등장하는 '불안'의 다른 형태에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말을 빌어보자면 불안은 '발아래 쩍 벌어진 심연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 때문이라는데, 자유에서 비롯되는 어지러움이 불안이라기보다 순간이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망상에서 비롯되는 어지러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목 안에 붙은 작은 염증 같은 깃털이 기침을 해대고 있다. 껄끄러운 코로나가 함유된 공기가 떠도는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든 절규를 내뱉어본다.


2025년 4월 18일, 다시 시간을 타고 지나온 그 자리를 돌이켜보면, 현재에서 쓰고 있는 마스크는 쾌걸 조로의 안대를 입에다 잘못 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코트의 단추가 잘못 끼워진 오역된 행동들로 인해 우리의 사회가 비밀스러운 질병에 오염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검고 하얀 불인식이 회전한다. 미지의 외계인과 접촉한 감염이 직접 입에 부딪힌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의 사스(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보단 낙타의 기침이 감돌던 메르스(MERS-COV, 중동호흡기증후군) 때였을 것이다. 2015년 이맘때, 홍콩행 비행기에 탄 승객은 승무원을 제외하고 세네 명뿐. 전세기처럼 텅 빈 그 좌석 안에서 억지로 간질거리는 기침을 참던 밀폐된 공간의 기억도 떠오른다. 우여곡절을 지나 우리의 봉쇄되었던 입은 코로나 왕관을 벗어던지면서 그 무게에서 해방되었다. 이토록 호흡이 절실했음에도 침묵에서 벗어난 우리는 더 가벼운 말투로 자잘한 음모와 비방이 가득한 농담을 퍼뜨리고 있다. 만연한 절규가 이렇게 비통한 침묵이라면 머리를 엄습하는 전율과 귓가의 뇌성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때의 공기는 사라졌지만, 그때의 힘겨운 숨결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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