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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13. 2024

DRESSMAKER

이야기를 짓는 여인

백설공주, 인어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엄지공주, 오로라공주, 완두콩공주. 공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미운 일곱 살 '오리'는 종이오리를 할 때 프릴이 많은 드레스가 귀찮았다. 종이를 잡고 엄청 커브를 돌려야 하고 엄지까지 뻐근해지게 자잘한 레이스를 컷팅하려면 시간낭비 그 자체였다. 오리는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눈과 코, 눈썹과 입에 집중한 뒤 얼굴만 동동 잘라냈다. 그리고 목으로 손길을 돌리는 순간, 종이인형 모가지가 뎅강 잘려나갔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오리는 분리된 머리와 몸을 바라보다 눈을 한바탕 굴린 뒤 뒤처리를 고민했다.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ERASERHEAD)> 속 아이처럼 머리와 몸체가  동강 난 종이인형들을 찢어버리는 건 사람 된 도리가 아니었다. 아직 잘리지 않은 종이인형세트들까지 함께 모아 합장(合葬)을 하는 게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 오리는 성냥불을 피워 그 모든 것을 한 줌의 재로 화장(火葬)시켜 주었다. 하늘로 날아간 종이인형을 보며 오리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잘 가!' 일곱 이었던 '오리' 종이인형들과 바삭하게 이별을 고했다.




아카데미든 청룡이든 칸느든 베를린이든 그래미든 뮤직어워드든 영화제와 시상식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드레스는 동화 속 사랑이나 희망과는 전혀 상관없는 클리세(cliché)다. 어린 시절 서툰 손놀림에 머리 거세된 종이인형과, 어울리지 않은 드레스에 머리만 커다랬던 뽀글이 배추인형, 홈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뒤 다방에 나른하게 앉아 아내를 내팽개친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마담들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하긴 현실에서 입지 않는 길고 나풀거리는 드레스는 70년대 유행했던 나팔바지처럼 더러운 바닥을 쓸기에 만점이다.


2000년대 중후까지 앙드레 김 선생님의 피날레는 항상 주목받는 패션이미지로 꼽혔다. 런어웨이가 끝날 때 남녀가 살포시 이마를 맞대고 관객을 바라보는 파이널 키스는 당시 대중문화의 인기인이라면 거쳐가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난 그 장면을 보면 한 편의 코미디라고 중얼거렸다. 환타스틱 하기엔 커다란 나팔꽃 드레스 위로 어울리지 않는 깻잎머리를 하고 헤어젤을 바른 배우와 모델들은 확실히 또래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것을 '과하다'라고 말해도 '성장(盛裝: dress up)'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2003년,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친구들과 헬퍼(HELPER)를 한 적이 있었. '선배님'이라고 부르기엔 우리는 기수로 따지면 169번째라, 꽁지바리에서 영화배우와 모델들에게 드레스를 입혀주는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공주들의 뒤를 봐주는 하녀 역할이어선가 쓰레기 청소에 열중하던 나는 무대 뒤에서 허기의 냄새를 맡았다.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 며칠 굶은 냄새, 그 시큼한 냄새를 맡으며 대학시절 특기생으로 들어왔던 피겨선수 H를 떠올렸다. 빵과 과자를 달고 살던 그녀는 아침에 항상 누렇게 뜬 얼굴로 수업에 들어왔다. 책상에 엎드려있기는 수업 끝날 때까지 계속 됐던 거 같다.


- 왜 빵하고 과자만 먹어?

"체중 유지해야 해. 코치가 더 찌면 안 된대."

- 밀가루가 더 살찌는 거 아니야?

"밥보단 간편하잖아."

- 그럼 종일 이런 것만 먹어?

"아니. 막 먹고 싶을 때 있어. 밤에 먹고선 후회해. 그리고 토하곤 하지."

- 지금도 날씬한데?

"그래야 된. 페어를 하려면 무거우면 안 되니까."


'싱글로 점프하면 그만이지 남자가 들어줘야 한다고? 남자가 힘이 없나?' 나직하게 속으로 욕을 내뱉었지만 배고픈 그녀에겐 말하진 않았다. 스스로 왜 이걸 하는지도 모르는데 속에서 게워낸 토사물은 그녀의 위장을 채우기엔 버거웠을 것이므로. 날씬했던 그녀는 빠짝 말랐던 패션쇼 무대의 그녀들과 비슷한 속이 허한 냄새가 났다.


그때와 달리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미디어 속 여인의 이미지는 여전히 혼자서 날기엔 어려운 '공주드레스'를 걸고 있다. 그 환상에 젖어 근사한 왕자가 에프터를 신청해 주길 기다리는 거울 속 공주들은 굶주린 채로 고래뼈로 만들어진 볼륨 있는 페티코트와 갈비뼈까지 으스러뜨리는 코르셋과  레이스로 범벅된 크림 케이크 드레스 입는다.


어차피 난 공주과에서 멀어진 상놈의 자식이므로 연장을 집으면 원하는 옷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맞게 뛸 수도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춤을 출 수도 있고, 커피도 마실 수 있고, 귤도 까먹을 수 있고, 길바닥에 앉아 음악도 들을 수 있고, 계단에 앉아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찍을 수 있고,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쓸 수 있는 그런 옷을 말이다. 그게 요즘 말로 '컨템퍼러리(contemporary)'라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나의 드레스코드는 내가 숨 쉬는 생활과 맞닿아있으니까.




DUNGATAR, AUSTRALIA 1951. TILLY.


여인의 재봉틀이 돌아간다. 그녀의 이야기는 로맨틱 멜로? 호러? 스릴러? 추리극? 액션? 장르가 혼재되어 있으면서 무겁지 않은 퀴어무비의 장점이 극 속에 묻어있는 영화 <드레스메이커(DRESSMAKER)>는 외딴 마을 던가타로 돌아온 한 드레스메이커의 기이한 복수극을 다루고 있다. 25년간의 침묵을 뒤로하고 황량한 도시를 채우는 아름다운 옷들 속에 인간의 탐욕, 애증, 거짓, 편애와 같은 날것의 상처가 가득하다. 물컹하게 곪아터진 문제들이 하나둘씩 드러날수록 최고의 수제품을 다루는 손길의 허망함이 그 의미를 찾게 되는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고 있자니 결코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의 잡담을 계속적으로 듣고 있는 느낌이었다.


테이프가 끊어져야 우리들의 지루한 싸움도 멈출 것이다. 나를 만들어 준 아버지와 재능을 선사한 어머니, 사람들의 삐뚤어진 편견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남자, 이 모두가 사라진 도시와 화끈하게 이별하는 방법은 가슴속 불길보다 더 뜨거운 후회의 화염 한 불구덩이를 쏟아 넣는 것이다. 옷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남듯이, 사람은 사라져도 드레스메이커는 존재한다.




[DRESSMAKER : The Woman Who Creates Stories] 2024. 2. OPEN-AI DALLE·3 & PHOTOSHOP designed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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