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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TTON CLUB

<코튼 클럽> 저층과 상층의 엘리베이터

by CHRIS
[THE COTTON CLUB, Francis Ford Coppola 1984]


시기별로 집중하는 대상이나 발산하는 감정이 다른가 보다. 연속, Am I Blue. 시선을 파랗게 멍 들이는 화면에 유독 감정이 꽂힌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누아르에 온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주말이면 쿨한 영화 한 편씩 보기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는데 그게 어느 순간 매일로도 부족할 만큼 영상중독으로 전환되었다. 마음껏 볼 수 없게 된 현재는 머릿속의 영사기를 돌리며 나를 위한 주말의 명화를 튼다.


영화, 하얀 스크린 위로 다갈색 소음이 퍼진다. 현실과 나 사이에 벌어진 의식을 컴퍼스처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창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풍요로운 세계를 열어주는가. 눈에 보이는 대화 상대 없이도 대리 격의 인물들과 다양한 소통을 실행하는 조립식 액자는 이탈자의 감상을 허락한다. 직접 만드는 공동작업은 불거진 체질과 접속불가이지만 감상 쪽으론 꽤나 흥겨운 탈출구를 제공한다. 욕구를 대리하는 즐겨찾기 항목인 과격한 터치와 총질이 난무하는 갱스터무비는 어두운 곳에 가려진 폭력과 선혈로 맺어진 우정을 기본으로 하기에 반항을 표현하는 행동의 지도라고 할까?


누구와 심장발사를 해볼지 쏠 데를 가려서 쏘고 싶다. 조립식으로 분리된 캐릭터들의 방을 현란한 장면회전을 통해서 프리즘으로 능숙하게 연결한 프랜시스 코폴라의 세계로 들어간다. 코폴라는 섬찟함을 휘젓는 유머로 어지간한 사건에는 꿈쩍하지 않는 발을 조급히 구르게 만든다. 수학과 문학이 기발한 결합을 이룬 분할 장면마다 넘쳐나는 흥미로운 요소들만이 아니라 음악적인 대사와 전복된 장면 구도, 역설의 행위와 조각된 연출이 스토리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재미가 가득하다.


잠도 오지 않는 조용한 새벽, 진실한 베라의 클럽을 건너 하얗고 까만 코튼클럽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며 긴 포즈로 누워본다. 최고의 재즈스윙 뮤지션과 검증된 악단, 내로라하는 춤꾼, 독한 위스키와 경쾌한 싸움질, 매력적인 아가씨들과 총을 든 건달, 아름다운 정부와 갱단의 보스, 영화배우와 가수들이 빼앗고 훔치고 복수하고 도박판을 벌이는 살해와 음모가 마르지 않을 검은 별나라.


오늘은 쉬련다 바람아 불어라

마음대로 바람아 불어라
하늘엔 비구름
마음대로 불려무나
언젠가 햇살이 빛나리
오늘은 쉬련다 바람아 불어라
마음대로 바람아 불려무나


가창력 끝내주는 흑인 재즈 보컬의 리듬에 몸을 실어도 김 빠지게 흥이 안 난다. "세상에서 견딜 수 없는 일이 뭔 줄 알아? 살인을 구경하거나 그런 일을 겪는 것이라고." 극 중 리처드 기어의 대사인데,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 견딜 수 없이 서러운 일이 있을까. 지금 시대에는 그럴 가능성과 요소들이 늘어나는 직업군만큼이나 다채롭고 은밀해졌다. 한 조각 경각심만 갖고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직접적인 경험에 있어서 가상현실을 탈피했음을 경고하지만 배신과 질투의 끝은 한 발의 총알로써 과격해지면 연발로 종말을 고한다. 덧없음의 잔상은 진한 키스를 하고서도 떠나라 쉽게 말 못 하는 무력감에 헤엄치고 있다.


가솔린을 탄 위스키는 왕성한 식욕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혀끝과 조우하지 못했다. 화력을 최대한 걸기 전, 엔진은 얼마나 뜨거울까? 아니, 유황보다 더 밋밋할까? 불타는 취기가 넘치는 지하세계는 개미들의 아지트처럼 다층이다. 게다가 그곳은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비밀이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상층으로 이어진 계단에 총과 술통을 짊어진 강력한 공포와 헛된 충성이 겹쳐지는데 생명의 배당금이 누구의 머리통보다 배가 된 마왕들이 쉽게 뚜껑을 열어줄 리 있겠나. 무리화된 폭력은 일 미터 정도 밖에서 관람해야 한다. 고막을 먹먹하게 만드는 빗소리. 나에게 총알이 날아오지 않고 내게 각목을 내려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 상태에서는 위협조차 굉장한 스릴이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하고 악수를 거절해 버린 오후, 뒤집힌 우산이 눈을 가릴 때 갑자기 누군가의 분노는 사과 파는 아이에게 던져질지 모른다. 그 시각 살인과 파괴를 실행하고 범죄의 탈을 썼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탭댄스의 신나는 전율에 신음을 가리면서 박수를 치겠지. 그리고 매일 슬픈 이는 "키스만 하고 떠나요. 아무 말 없이..."라고 속삭이며 사랑하는 연인을 밀어낼 것이다. 거리에는 자화상이 되어버린 영화포스터가 현실에 남겨진 한 사람 뒤로 빛난다.


기차 플랫폼에는 여행객, 짐, 시체, 장사꾼, 범죄자, 차장, 배웅객들이 일시에 모인다. 해피엔드는 이십 세기에 마감되었다. 이십 일세기에는 잠에서 깬 사람이 다시 극 연출을 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이 재미있다. 코폴라는 카메오일 뿐이었을까, 극조종사였을까. 시대의 문화와 역사, 정치적인 구도와 더불어 일상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는 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갈등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저층에서 상층으로 오르는 사다리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바뀌었다. 그러나 머리에 달린 눈, 코, 입. 몸통과 팔다리라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신체 구성요소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시대의 유행스타일과 각자가 품은 희망은 다른 색과 발산 형태를 지닐지라도 원대한 바탕에 다양한 빛깔이 모이면 결국엔 한 가지 톤을 유지하게 되어있다. 암흑과 빛은 양면 모자를 눌러가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2005. 5. 15. SUNDAY



의식을 재단하기 위해선 자기 언어를 디자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체성을 가리고 대중적 환상에 따라 은밀하고 위대하게 자아를 장식하는 매몰된 욕망은 작가에게 솔직한 표현의 창을 열어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감출 것이란 가려진 감정의 태도일 뿐 나를 드러냄에 있어 시선의 우주를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도식적인 언어인 프롬프트에 반응하는 기계적인 모습을 버리고 인간적인 나를 드러낼 방법을 찾고 있다.

전에 어떤 작가가 그랬다. 40년간 작품활동을 했는데 작품은 팔릴 일이 없고 아무도 안 알아줘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비해 재능이 없는 줄 알았다고 말이다. 머리가 희끗해지고 묵묵히 쌓인 세월이 지나서 작품을 처음 팔게 됐는데 그 오랜 기다림 때문인지 사람들이 열광하는 반응에 오히려 마음이 담담했다고 한다. 40년의 기다림, 혹은 일평생 쏟아붓는 시간은 내면의 눈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마음의 깊이를 쌓아가는 세상을 향한 멈추지 않는 발걸음이다.

모든 일에 의문을 가지며 알 수 없는 오늘을 계속 반복하는 작업은 헛된 일이 아니다.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질문은 고독한 길을 걷는 자에게 필수적인 자극점이다. 멈추지 않고 하루에 한 걸음씩 가는 것은 미련스러운 우직함이 아니라 오늘의 추적거리는 날씨를 황금의 시간으로 바꾸는 유일한 마법이다. 자기를 꺼내놓는 일은 피로하고 답답하지만 세상의 이격을 깨닫는 날카로운 외침이다.

가끔, 아니 자주 쉬고 싶다. 아직은 편안히 쉴 날이 아니어서 기다림을 기다리는 잠시의 쉼에 기대어 사유의 공간을 정리해 본다. 생각의 무게는 가벼운 깃털로 흩어지고 무거운 돌처럼 결리기도 한다. 구조화된 몸과 굴려진 말을 통해 살아가는 의미를 조형하고 시간을 저장하는 오늘, 이 세상과 저 세상에 걸쳐진 유형과 무형의 존재들은 그 어떤 사이에서 사유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살아있다고 느끼는 하루에 잠시 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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