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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QUIEM, THE LAST ENTRY

<바이올린 연주가 끝날 때> 끝이 아닌 시작

by CHRIS


[And the violins stopped playing, Alexander Ramati, 1988]


이십 년 전 2005년 4월 4일의 글이다.

바이올린 연주에 불이 켜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거리를 떠돌게 하라.

어머니가 물려준 패물 걸치고

영롱한 점괘가 영원토록 빛나게 하라.

아버지가 물려준 금시계 차고

시간이 죽음의 게토에서 흐르게 하라.

바이올린 연주가 모두 끝나면

쓸쓸한 영혼이 그대에서 떠나게 하라.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善終)을 들었는데 솔직히 무덤덤할 뿐 슬픔은 아니다. 그러나 감정이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오래된 감정이 다시 노래되길 원치 않았을 뿐. 이 동요 없는 감정은 내가 ‘그’라는 사람을 미디어를 통해 접한 이래 실제로 잘 모른다는 사실이 어딘가 축적되어 있을 슬픔을 제거해 버린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는 모습은 즐거운 이방인의 축제를 떠올리게 한다. 표정 없는 얼굴은 수십 억의 사람들이 애도하는 경건한 죽음 앞에서 깊은 조의를 표하지 않는 경박함으로 보일 수 있겠다. 존재의 종말이 다가오고 순환이 시작하는 과정은 만물의 이치에서는 매한가지지만, 거둬줄 손길도 없이 대지만이 진물을 받아내는 이유 없는 묻힘보다는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각질 돋는 세상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유명한 사람을 많이 배출하였다. 거룩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 역시 건조한 혓바닥을 드러내는 땅바닥에 무더기로 쏟아내었다. TV를 지켜보면서 교황의 화려한 죽음 앞에서 무명의 폴란드 집시들이 비참하게 맞이했던 홀로코스트를 떠올렸다. 같은 고향 출신이면서도 살아온 행적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토록 감정의 격을 두고 있다는 것이 무심한 배반을 발휘하게 한다. 성자보다 에어리언에게 사랑을! 고귀한 이름의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린다. 교황은 인류애를 설파하고 평화와 화합을 기도하며 교회의 과오를 반성한 사람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그러나, 그가 지적했던 유대인학살에 대한 교회의 묵인과 소외된 소수민족이나 이방인의 죽음에 대한 방관은 자성하자는 토로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도 진정, 애도를 발설할 수 없는 회색의 대지에서 아내와 자식이 검은 연기로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따분한 음악을 켜야 하는 남은 자들의 공포는 아무리 예술적인 감성을 자극한다고 하더라도 삶의 애환을 담았던 시절을 무마하는 원동력이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약하게 거품을 흘리고, 가느다란 울음을 내며, 뼈를 삭히며 죽었는데 그렇게 쉽게 잊히겠는가.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 보니 누군가가 틀어 놓은 애절한 바이올린 연주가 귓가에 앉았다.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면 집시는 떠나간다고 하였다. 불을 피웠던 자리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지옥에서 벗어나면 동굴에 갇혔던 사실을 사람들은 곧 잊는다. 나이 든 자는 활을 켜며 기억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 애수에 찬 음색이 필요한 밤이다. 다가오는 새벽이 붉도록 깊다.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띵. 핸드폰을 타고 울리는 경고음이 낯설었다. 2025년 4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거했다는 사실을 아침마다 핸드폰에서 자동적으로 뜨는 뉴스 알림을 통해 접했다. "선종(善終)". 인간에게 선한 종말은 무엇이고 악한 종말은 무엇인가? 미디어가 학습하듯이 쏟아내는 한 사람의 사라짐은 죽음에도 귀천이 있고 색깔이 있고 선악이 있는 것인지 묻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죽음 앞에서 나의 기억은 급속하게 과거로 당겨졌다. 그래, 그때도 사월이었나? 잠시 앉아 눈을 감고 죽음이 나열된 시간을 돌려보았다. 2005년으로 기억이 당겨지면서 당시에 만연했던 미국과 이라크 전쟁,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곧, 화염과 비명의 홀로코스트만이 아니라 내 안에 고이 묻어둔 과거의 시간까지도 숨 가쁘게 조여왔다.

서양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누군가의 죽음 뒤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감사하는 오늘에 대한 인사 이외에 신앙생활이 부재한 나의 현재에서 부활절만이 아니라 곧 다가올 부처님 오신 날까지 생활에 매진해야 하는 나로선 타인의 포장된 사라짐은 의식의 시차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몸 밖으로 쏟아내고 싶었던 기억은 이제 하나의 정렬을 위해 잠시 묻어두고 말 없는 자의 시를 써 내려가야겠다. 누군가의 죽음이 말이 없어도 의미를 가진다면 인류 평등의 관점에서 그것이 거대하든 평범하든 간에 침묵 또한 공명하는 의식의 텍스트가 될 것이다. 난 침묵을 거두고 이제 말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누구나에게 들리는 말을 멈추기로 했다. 내 말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들릴 필요는 없다. 존재를 되새기고 침묵하는 모든 이들에게 안녕을 고한다. 다시 내일로 부활하는 시간과 만나기 위해 어제의 기억을 잠시 봉인한다.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면, 우리의 서사시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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