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단상: 양면의 세계> 돈과 빚, 육체적 생활과 지적 생활
관심사와 행동패턴을 반영하는 페이스북은 프로그래밍 작업자들과 전문 경영인, 구조적 형태를 만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돈의 정의에 대한 책을 읽으며 돈(Money)과 빚(Debt)에 대한 워런 버핏(Warren Edward Buffett)과 로버트 기요사키(Robert Kiyosaki)의 말을 상기해 보니, 빚으로 돈을 만드는 사회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인식으로 존재하는 돈의 속성을 살펴보게 되었다. 가상 개념의 돈을 통해 차액을 설정하고 이것을 부의 개념으로 증식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 것만이 돈에서 멀어지는 방법이다.
이미 알고 있는 개체성, 각자의 변용은 하나의 삶의 세션이 유지될 때만 유용하다. 모든 생명체의 기본 요건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은 역사적 인류가 설정한 물물교환의 다른 의미로서 자신이 가진 재능이나 재화를 팔아 화폐적 단위의 돈을 벌어야 할 것이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에서 어떻게 돈을 굴릴 수 있을 것인지의 입장으로 선회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는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예술을 할 것이냐, 돈을 벌 것이냐의 선택과도 결부된다. 나는 다양한 경험의 스펙트럼을 통해 사고를 하고 의식을 기록하며 내면을 표현하는 철학적 창조자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개인적인 이상점인 예술철학은 현실적인 숫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한 아름답긴 어려울 것이다.
필립 길버트 해머튼(Philip Gilbert Hamerton)은 《지적 생활의 즐거움》에서 육체적 생활과 지적 생활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육체적 생활과 지적 생활은 별개의 얼굴이 아니다. 뛰어난 문학가들, 특히 오랜 세월 위대한 작가로 불려 온 대가들에게는 풍부한 운동 경험이 있다. 그들에게 육체는 가장 훌륭한 소재였다. 그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재는 다양해졌고, 인물은 풍부해졌으며, 문체는 살아있는 생명을 누렸다.”
현대의 작업 생산물은 복잡한 사고를 표출해야 하기에, 풍부한 육체적 운동 경험보단 관념의 정립에 머무르기 쉽다. 내부적 사고를 현실화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동의 힘을 모아 대량생산을 준비하는 작업을 뜻하기도 한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들은 분화된 공동작업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인본주의 브랜드를 만들어낸 창립자라면 소품종 대량생산이건 다품종 소량생산이건 창작자의 철학적 개념을 이어받아 공동의 손길을 거치며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작품 하나에 대표 이름만 남는 화룡점정이 끝이라 해도 말이다.
사람들은 나들이를 통해 정신을 가다듬고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간다. 최근의 기억을 돌아보니 나를 찾기 위해 돌아다닌 2007년의 중국 여행이 가장 여행다웠다. 일을 위한 여행은 마음 씀씀이가 피곤하다.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상대를 파악해야 하니까 속이 홀가분하지 않다. 일로 만나던 우연히 만나든 사람들의 관계에서 육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타인이 말하는 생활의 이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육체적 생활과 지적 생활은 별개로 보기 어렵다. 육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뇌리에 지적 경험을 쌓는 일이며 습관이란 흔적을 남기는 상호적인 결과로 연결된다.
육체적 생활과 지적 생활은 결국 허상의 돈과 허구의 빚처럼 분리될 수 없는 양면이다. 몸을 움직이며 경험한 것이 사고를 만들고, 사고는 다시 습관과 흔적으로 육체에 새겨진다. 돈과 예술, 노동과 창조, 육체와 정신은 모두 갈라진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궤적을 그리며 이어진다. 나는 여전히 이 양면의 세계를 탐구하며, 그 속에서 삶의 균형을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