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가 필요해요
- 정리하려고요.
- 정리 중이에요.
- 정리한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 정리가 끝나면 보여드리죠.
결벽증 환자처럼 '정리'라는 말을 달고 다닌다. 나에게 정리(整理)는 산재한 기억과 흩어진 감정을 하나로 모으고 체계적으로 분류한 뒤 종합하는 하나의 밑작업이다. 다른 말로는 조각난 삶을 다시 잇기 위한 이유를 수집하고 대상의 명제들과 근거를 조립하는 기초 작업이다. 그런데, '정리'를 말했더니 자주 사람들은 그 말을 오해하곤 한다.
"이제 이거 안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그게 내가 말했던 그 정리인가? 아예 손 털고 끝내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 그냥 청소했어요. 말 그대로 대청소.
'목욕을 했다고 해야 했나?' 집구석을 내버려 두고 한 바퀴 돌고 오면 정리가 필요하다. 한번 도망간 기억들과 터져버린 정신은 길을 찾을 수 없게 비밀스러운 자신을 만들어낸다. 꼬치꼬치 캐묻는 것들에 대답도 귀찮아할 만큼 지쳐있었나 보다. 이제 다시 일어나야 하고, 청소할 시간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갈등한다. 영화를 볼까, 잠을 잘까? 잠을 깨울만한 가치가 있는 영상들이 없을 땐 허무하게 시간을 죽이는 ‘눈뜸’의 노고가 반갑지 않다.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 직전에 서 있는 요즘, 난 ‘원래’라는 말도 잘 이해되지 않은 무감의 상태이다. 뒤바뀐 현실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던 통분도 수그러져 있다. 슬픔이여 안녕. 이제는 우울한 노래를 들어도 찡그리지 않는다. 얼굴을 가벼이 어루만지는 햇살에 감격하지도 않는다. 그냥 가만히 나를 내버려 두고 나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는데 열중한다.
그런 생활이 한 달 정도 되었다. 하나의 종말을 위해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해야 하는 달림도 멈추었다. 멈춤은 달리는 자를 달리게 하고 달림은 달리는 자를 멈추게 한다. 움직이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다면 얼마나 숨이 막힐까? 상상을 그만둔 룸펜에겐 진통제도 필요 없다. 목구멍을 간질이던 황사바람 같던 고통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어두컴컴한 시골집에 앉아 바람이 방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빔 벤더스의 <폭력의 종말(The End of Violence)>. 완전 서스펜스 같은 걸. 나는 비스듬히 소파에 몸을 묻고서 몇 달 뒤 만끽할 자유를 상상하며 소리 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의 레이더 망에서 몸서리쳤다.
빔 벤더스(Ernst Wilhelm Wenders) 감독의 묘한 화해방식이 마음에 든다. 바쁘게 움직이는 공동체 속에서 스멸히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각성은 기척 없이 백회혈을 누르는 적들의 살벌한 총구를 느끼게 한다. 어릴 적 어둠 속에서 감지한 안구가 상실된 뭉근한 공포 말이다. 자발적인가 이타적인가의 경계조차 사라지는 인생의 삼인칭 시점에서 우리들은 변화를 선택해야 한다. 분할된 사건의 연결곡선을 타면서 감정이 메마르지 않게 급작스러운 습격에 대비해야 한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어떤 일들을 기대하면서 당황해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다시 일인칭으로 자신을 말하면서 사는 일은 전환점이 주어지지 않고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힘들이지 않고 되는 일이 얼마나 있겠냐 만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폐부를 찌르는 이별에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
여전히 '종말(END)'이라는 단어는 믿을 수 없는 단어이다. ‘다시는(AGAIN)’ 혹은 ‘절대(NEVER)’처럼. <폭력의 종말>은 거창한 제목이다. 그리고 꿈같은 선택이다. 어딘가에 종말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환상일지 모르겠다. 하나의 소멸은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오므로 모든 것의 끝은 끝이 아니다.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상태가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나를 잠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때가 바로 탈출할 시점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안녕을.
2007년 3월, <폭력의 종말> 영화를 보고서 휘갈겼던 메모를 꺼내보았다. 그땐 정리보단 일단 떠나야겠다는 일념만 있었다. 잠시 벗어나야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환상에서 살아남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어느 날, 어질러진 잔해를 멀리 묻어두었다. 이젠 그것도 꺼내야 할까 보다. 그게 시작의 한 걸음이다.
책과의 놀이에 빠져있던 여덟 살, 《작은 아씨들》은 명작동화 중에서 볼만했다. 영화나 드라마로도 봤지만 실사의 인물들은 생각하던 이미지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매그, 조, 베스, 에이미 중에서 주관이 있는 '조'가 좋았다. 전형적인 어른이었던 매그나 연약하고 아픔을 달고 있는 베스, 징징거리고 깍쟁이 같던 에이미보다 털털하고 솔직한 조가 말하는 것은 들을 만했다. 난 그녀에게서 청소방법을 배웠다. 책부터 한데 정리해서 책상 한번 쓸고 침대 전체 훑고 바닥쓰레기 집고 총채로 사방의 먼지를 털어내면 즉석 3분 카레 시간과 동일하게 청소가 끝났다. 다만 이번 대청소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정리를 하면 지워진 과거와 미래의 단서를 잡을 수 있다. 탐정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범죄자의 쓰레기통부터 뒤지는 건 범죄자가 숨기고 싶은 치부와도 같이 찢어버리고 싶은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난 나를 찾기 위해서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아니, 너를 찾기 위해서.
[MEMORIES] 2008. PHOTOGRAPH by CHRIS
2013. 6. 22. SATURDAY
폭력의 긴장이 흐르는 열기 속에서 씁쓸하게 말했던 적이 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인류를 말아먹게 대량으로 죽이면 '영웅'이 되는 세상이라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폭력이 낳은 결과는 몸과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63년이 지나도록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폭력의 상처가 잊혀지지 않았듯이 말이다. 어제 KBS에서 본 6.25 전쟁 뒤의 아픔을 달래는 [정전 60년 KBS 다큐콘서트]. 영화 '피아니스트'와 '글루미선데이'가 결합된 기이한 프로였다.
In the midst of the tension of violence, I once bitterly remarked that while killing one person makes you a 'murderer,' killing masses makes you a 'hero' in this world. Regardless of the circumstances, the outcomes born of violence inflict pain on both the body and the soul. Just as the scars of violence lingered with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war for 63 years, as seen in the KBS documentary concert [60 Years of Armistice: The Pain after the Korean War] aired yesterday. It was a surreal program that combined the movies 'The Pianist' and 'Gloomy Sun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