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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19. 2024

HUNTER

레버넌트, 죽음과 생

모든 생명은 살아있는 동안 본능을 따른다. 생(生)이 선사한 사명은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살아가는 것이며, 생이 다하면 그것에 순응하여 정리를 다 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정신이라는 돌연변이 구체가 있어서 한번 더 생각의 굴레를 가지게 되고, 윤회라고 착각하는 이 정신의 흐름이 삶에 변수를 가지고 온다.


난 어렸을 때 호기심이 많았다. 스스로 대상에 다가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잡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사로 잡히는 느낌은 주체적인 감각을 놓치게 한다. 다만 무언가를 계속 잡고 그것을 요리하다 보면 혹은 다루다가 보면, 사냥꾼의 본능인 수렵 감각은 강해지지만 대상과 함께 공감하는 심장 속의 감각은 무뎌지는 반대급부를 가져온다.




고등어를 처음 만졌을 때가 생각난다. 먼저 칼을 세워 살과 연골을 짓이기며 길쭉하게 틈을 밀어 넣는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일렬로 반을 가른다. 갈라진 뱃살 사이로 날카로운 가시들을 헤치고 미끄덩한 감각의 내장과 부산물을 끄집어낸다. 흐르는 물에 골 사이에 눌어붙은 지방과 핏덩이를 흘려보낸다. 손에 남겨진 기름지고 붉은 흔적들을 바라보니 비릿한 피냄새가 난다. 눈살을 한껏 찌푸린 채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손질한 생선을 달궈진 팬에 올려놓는다. 자글거리는 기포와 비린내가 익어가는 냄새는 점차 허기를 부르는 소리로 바뀌어간다. 방금 전 날 것이 남긴 생생한 충격이 손가락과 콧 속에 남아있지만 고소하게 튀겨져 가는 생선구이 냄새를 맡고는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기름기가 자르르 돌면서 윤기 나는 통통한 속살을 보며 껍질을 헤치고 살을 부순다. 순간 고등어를 어떻게 손질했었는지 잊어버린다. 오직 한 입 더 먹고 싶은 욕구로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데 집중한다.


날 것을 익히고 그것을 섭취하는 행태를 우리는 문명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야생의 순간을 탈피하는 과정은 우아하게는 '요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며 잔인하게는 '도살'이란 모양새로 수식된다. 인류는 농사라는 문명의 생산작업을 이어가기 전엔 모두 '사냥꾼'의 형태로 삶을 지속했다. 어두워지면 죽음과 가까워지는 위협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된 작업이다. 이미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는(REVENANT)' 미친 도전은 극한이라는 최고점의 카타르시스를 휘몰고 온다.


휴 글래스라는 사냥꾼의 삶에 대한 집념과 복수를 담은 <레버넌트(REVENANT)>는 하나의 소유물을 놓고 값어치를 매기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살육을 일삼는 문명화의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터전을 빼앗긴 자들과 터전을 빼앗고자 하는 자들의 순환적인 살육과 사투, 그 안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의 극한과 인간만이 갖고 있는 철저한 이기심에 대해 피로 얼룩진 시간을 할애한다. 극 초반 아기곰을 보호하고자 본능적으로 사냥꾼의 몸을 너절하도록 도륙해 놓은 어미곰의 야생적인 도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털북숭이의 무거운 죽음은 인간이 냉철한 이성보다는 본능과도 같은 즉각적인 감정을 통해 동물보다 더 과잉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살육의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임을 경고하는 메시지이자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레버넌트>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극이라고 보기보단 문명의 본질과 삶의 과정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요구하는 영화이다. 삶에서 소중한 사랑을 빼앗은 타인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죽음으로부터 한 사람을 일으키는 동시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생명을 끝장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면 우리 삶의 본질이 '사랑'과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생과 사의 끊임없는 투쟁을 거듭하고 있다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투쟁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리품인 곰가죽 위로 날 것의 슬픔을 내보이는 휴 글래스의 시선이 돌아올 수 없는 한 방향으로 영원히 전진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감정이 들어가야 우리의 생이 의미롭게 성립이 될까? 나의 분신인 자식은 곧 나이므로 생의 본성을 따른다면 우리들의 삶은 계속되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생물 본성의 순환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일까? 서사적인 이야기에서 맴도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살면서 일직선의 길을 고집하다 보면 되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던, 죽음을 피하려고 나아가던, 죽음이 없는 곳을 찾아가던, 시간을 달리는 자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생이 있기에 죽음은 필연적이며, 죽음이 있어야 생도 그 의미를 지닌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나에게 있어서 날 것에 대한 기호는 살아가려고 선택했던 하나의 이유였고, 날 것에서 맡는 추억은 태동부터 가졌던 선택이었다. 이제 그것도 사양길을 걷고 있다. 외피의 재생 방법을 연구한다던지, 대상물의 수명을 늘려보려고 여러 가지 고민을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껍질은 한계가 있다. 껍질 안에 담는 것이 외적인 형태보다 수명이 길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요즘 가시적인 유형의 형태를 무한한 공간 위에 늘어놓아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문득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 '레버넌트'의 끝없는 시선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살아있는 동안은 생명체의 본성에 따라 지속을 고민하고 있다. 여하튼 나는 생의 본성에 따라 살아갈 것이므로 계속적인 전환을 고민하며 영원하지 않을 것에 슬퍼하지는 않는다.  




   

[REVENANT, RECYCLE, CIVILIZATION] 2024. 2. MULTI MIXED IMAGE. DESIGNED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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