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브룩하이머로부터의 돌연한 창작 연상
소위 '창작'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생계형 창작은 타인의 평가를 통해 가치를 얻어내기 때문에 자발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요구에 따라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스스로에게 허무하고 자기 파괴적인 장치는 없다. 하지만 현대의 모든 창작은 순수하게 취미나 재미로만 먹고서 살기엔 자급과 자립의 시간이 길어져서 이미 정상적인 생산 궤도를 이탈했다.
요즘에는 모두의 눈에 공감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나 아름다움이라도 소비를 촉진하는 '마케팅'이라는 반복적 세뇌효과에 의해 새롭게 예술사의 왕좌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인 돈(MONEY)이라는 금전적인 약속체에 창작이 결합되면서 상업예술은 21세기에 가장 빛나는 언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최상의 힘 있는 것들은 정점에서 끌어지듯이 최고의 것은 여럿일 수 없다. 소수의 존재 영역에서 창작과 돈을 함께 쥘 수 있다면 파워풀한 게임은 시작된다.
십 년 전, 제리 브룩하이머(Jerome Leon Bruckheimer)의 성공 일대기를 읽으면서 한국의 제리 브룩하이머를 꿈꾸던 한 영화인을 떠올렸다. 번쩍이는 머니게임에서 탁월한 운대와 용인술이 현재의 것들을 밀어버릴 힘이 없는 자에게 선사될 수 있을까? 이상(理想)을 향해 갈수록 한국 사회는 이상한 결핍을 품어낸다. 최고를 지향하지만 최고를 위한 자리를 만들기 위한 능률적인 타협과 유연한 협상은 용인하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분수를 지키고 자기만족이라는 틀에 개인을 몰아넣고 울타리를 넘어 세상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경계를 한다. 아마도 일률적인 수평의 지렛대를 올리는데 힘을 쏟는 것이 미덕이라는 근대시기의 생존방식이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가장 취약한 것을 유용한 힘으로 둔갑시키는 지략이 있다면 새로운 시류를 업고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낼 것이다. 젊음이 가질 수 있는 힘은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이다. 외모의 늙고 젊음이 아니라 내부의 똘끼 같은 도드라짐이 필요하다. 스스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움직인다면 주변이 알아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도 쓸데없는 기대감이다. 일을 할 때나 무엇인가를 만들 때는 타인에 대한 기대감을 접고 계속적으로 실행에 매진해야 한다. 사지가 온전해지면 그땐 다시 떠나야겠다고 말하지만 혹시 늙어서 팔다리에 힘이 빠지지 않을까 조용히 발가락과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소중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도록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는 창작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