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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16. 2024

PORTRAIT

도리안 그레이, 시간의 초상(肖像)

[THE PICTURE OF TIME] SELF-PORTRAIT. 2024. 3. 16.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질투해요.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모든 것을 질투하며 당신이 그려준 내 초상화를 질투해요. 언젠가는 내가 잃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어째서 이 그림은 언제까지나 지니고 있을 수 있죠? 흘러가는 한순간 한순간이 내 몸 안에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내 초상화에 가져다주고 있어요. 아. 이것이 반대였다면! 내가 영원히 젊고 내 그림이 늙어간다면. 그렇다면 난 뭐든지 주겠어요.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 내 영혼까지도."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도리안 그레이의 독백



손바닥으로 가려지는 작은 얼굴에 도드라지는 턱살, 자주색 꼬리빗을 들어가지도 않는 교복 주머니에 꼽고 건들거리는 몸짓으로 거슬리는 존댓말을 던지는 그녀. ‘다리뼈가 산산이 부서져서 이 년이나 꿀었네’, ‘체육시간에 교실에 혼자 남아서 춤을 추네’, ‘머리가 어떻게 됐네’ 별별 소문이 돌았던 그녀와 짝이 되었다. 극성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놀기 좋아하는 나를 흘기더니 바로 침묵선언을 한다. 공부하기는 싫고 놀아야겠는데 눈길도 안주는 이 애를 보면서 말문을 터뜨리려 나도 옹고집을 부렸다. 수업시간 내내 칠판을 멀리하고 그녀의 얼굴만 봤다. 그 아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고 말 시키고 밥 먹던 삼일이 지났다. 그녀는 한숨지으며 말을 했고 서서히 자기 벽을 깨서 보여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나의 제일 친한 친구다.


다리에 열두 개의 철심을 꼽고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던 친구의 2년이란 병상(病床)의 시간이 나와의 터울을 벌려놨지만 동년배보다 더 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대학이란 한 곳에만 프리즘 꽂았던 고등학교 삼 년을 책과 그림과 연극과 토론과 비평과 쌈박질과 땡땡이로 함께했기 때문일 거다. 그런 친구가 무척 좋아했던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유미주의(唯美主義)에 흠뻑 빠져있던 그녀가 친구가 된 기념으로 나에게 처음으로 선물한 책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다. 학교와 집 밖에 모르던 단조롭던 학창 시절, 에로틱한 색채를 부여한 글자들을 보며 남몰래 쾌락의 늪에 빠진 듯한 전율을 느꼈다.


"내가 영원히 젊고 내 그림이 늙어간다면."


그 소원이 이뤄진 도리안의 파멸 보면서 먼지가 되어 흩어진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상에 뿌려뒀던 어리석은 마음이 저지른 행위라는 것을 발견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매력적인 욕망의 꼬리뼈를 뱀 혓바닥처럼 내두른다. 그의 가늘고 기나긴 채찍에 걸려 나도 잠시 휘청인다.


나는 감각만이 무료한 영혼을 달래주는 거라며 도리안을 파멸시키는 유혹적인 목소리를 가진 헨리 경의 부도덕한 말투를 듣는다. 무료하고 부유한 생활에서 타인의 비밀을 만들어 기쁨을 찾는 헨리 경의 나른함에 숨멎을 매력을 느낀다. 나는 가질 수 없었던 요한의 사랑을 일곱 겹의 베일 속 찬란한 질투로 잘라낸 살로메의 음탕한 목소리를 듣는다. 환희에 찬 얼굴로 사랑하는 이의 목을 들고 승리의 표정을 짓는 그녀의 욕정에 미친 듯이 취해버린다. 나는 착한 일을 하다 부서진 납덩이 심장으로만 존재를 알리던 행복한 왕자의 텅 빈 안구를 바라보는 제비의 눈물 소리를 듣는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행복한 왕자에서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평범한 인간들이 저버린 비굴한 외면에 분노와 연민이 함께 올라온다. 가야 하지 않을 길을 알면서도 걷고 있는 나와 도리안 그레이(Dorian Gray), 살로메(Salomé),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서는 모든 이가 죄인의 탈을 쓰고 있다.


"죄악(罪惡)은 근대사회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색채다."라고 작가는 역설하지만, 그 말은 아주 자주 나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죄(罪)와 악(惡)은 어떠한 모습인가. 이것과 반대되는 선(善)은 또한 어떠한 모습인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은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착한 것이며 무엇이 나쁜 것인가. 휘몰아치는 도덕이 응집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어지럽다. 그 모든 개념이 무너진 세상에서 과연 행복은 무엇일까.

 

중간쯤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지근한 타협점이 손 내밀며 악수하기 싫게 위선적이고, 가장 악한 얼굴을 쓰고 있는 사람이 저지르는 극한점의 행동들이 물밀듯이 생활에서 미끄러질 때 나는 눈앞의 거짓된 모든 것을 살해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차마 비수를 들지 못한 떨리는 두 손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각인된 테이프를 카세트에 깊숙이 꽂는다. 다시 젊은 도리안의 독백이 시작된다. 나직하고 들뜬 음성이 흐른다. 자아가 오롯하게 살아있는 느릿한 목소리에 매료된 광기의 눈은 감미로운 검은 그림자를 따라간다.


“내가 영원히 젊고 내 그림이 늙어간다면.”


2004. 8. 22. 日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듣고 읽었던 이야기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었다. 책은 아직도 책장에 있다. 이게 내가 산 건지, 친구가 준 건지 모르겠다. 값 2,000원. 책값이다. 허름한 걸 보니 친구가 줬나 보다. 내 취향은 아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영어원서로도, 영어테이프로도 있었다. 헨리 경의 음성은 부드럽다. 도리안의 목소리보다 어두운 갈망을 부르는 그의 음성이 마음에 들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잠이 들었다. 아름다움에 휩싸이는 부드러운 베일 같은 느낌이 눈 속으로 파고들면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요즘 음악을 들으니 잠이 안 온다. 새로 시작하려면 비밀하게 숨겨둔 문을 열어야 한다. 숨겨둔 나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 적막함이 싫어서 음악을 켰는데, 갑자기 폭풍처럼 잊힌 시간들이 밀려왔다. 나를 바라보는 수행은 쉽게 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래도 예전의 터질 것 같은 분노는 사라져 있다. 난 기다리고 있다. 누구보다 길게 기다릴 수 있다. 모두가 사라진 세상에서도 난 살아남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서 온전히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머릿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그릴 것이다. 그게 내 안의 나를 놓아주면서 약속한 나의 비밀한 갈망이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 와서 차분히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십 년이 훌쩍 지났다. 테이프는 정리하면서 버렸다. 가끔 버리지 못한 오래된 책들. 나의 어두운 밤을 지탱해 줬던 책들을 보면 보지도 않으면서 그냥 만지고 싶다. 아무래도 음악을 끄고 자야 할 거 같다. 한 달 넘게 잠이 안 온다.


나의 초상도리안 그레이의 일그러진 욕망처럼 기괴하게 그려보려고 했는데, 안의 그녀를 그리고 말았다. 우린 만나기 어렵다. 내가 그녀인지, 그녀가 인지 모르겠다.



I tried to paint my portrait grotesquely like Dorian Gray's twisted desires, but I ended up painting the woman within me. We are hard to meet. I don't know if I am her, or if she i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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