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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17. 2024

ETERNAL SUNSHINE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

당신이 나의 햇살이라면 나는 어디에서도 좋아라

당신이 나의 햇살이라면 검붉은 눈물 말려버리고

당신이 나의 햇살이라면 아픔과 괴로움 사라지니

우리의 이별은 잊혀지고 나는 영원히 행복하여라




Montauk - 나의 이야기

해가 부서져. 눈물을 흘려본 적 있어? 초점을 잃어가는 마음들. 무엇이 좋을까? 우릴 덥혀줄 그 무엇! 그래, 해가 좋겠어. 귤탱이처럼 빛나는 머리카락과 츄리닝 차림의 쿨한 널 닮은 햇살. 저 따스한 광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우리의 모습도 그려낼 거야. 나의 클레멘타인, 잊는 게 두렵다고? 몬타우크(Montauk)에서 만나자. 다시 시작하지 뭐. 우리는 처음의 모습처럼 사랑하게 되겠지. 너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도 오케이. 화약처럼 튀어갈 네 엉뚱함도 오케이. 약간의 시건방짐도 오케이. 언젠가 다 지긋지긋해져도 오케이. 다 좋아. 시들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거야. 우리는 결혼도 할 거고.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끊임없이 변하는 동선과 부정형으로 돌진하는 관계대상에 대한 불안감은 인간들에게 속도를 제압하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막막한 제약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 소요와 갈등을 발생시킨다. 사건은 중립적인 표상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운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객체 내부에 존재하는 경험의 응집과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깨어나는 잠재된 의식의 충돌이 담당한다. 단순히 지각한다고 해서 능동적인 태도가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복잡함을 푸는 개개인의 욕구가 주된 힘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경험, 그 공간의 기억들.


바코드처럼 뇌리 한편에 뭉글뭉글 새겨지는 의미 있는 흔적 중에서 나는 어떠한 것들에 매여있는가. 새벽녘 안개는 언제나 황홀하다. 동공의 초점을 흐려버리는 계절의 뿌연 입김을 헤치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겨울바람을 맞았다. 첫눈은 내리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가 필요한 날이었다. 오래된 기억의 동굴로 자리 잡은 한적한 영화관에서 서로를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연인들을 만났다. 징글맞게도 엉켜버린 기억회로에 손을 대고 싶었다.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영원한 햇살이 비춘다. 기억을 접고, 열두 번 접고, 그래서 떠들썩하게 기네스북에 기재되는 것보다 힘겨운 조각들에 머리를 기댄다. 내 인생을 책임지고 있는 열두 가지 문신과 닮은 사랑이 흩어진다. 무질서한 행간 속에 나를 배치하다가 짜릿한 눈물을 맛본다. 어둠 속에 묻어둔 그대를 불러본다. 지워진 기억 속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선택한 일인데 왜 아파하는 거야?"

"빛을 잃어버렸거든. 나조차도 볼 수 없게 모든 빛을 잃었어."  

 

 


《예술과 시각적 지각: 창의적 시각의 심리학, 루돌프 아른하임》
  Art and Visual Perception : a psychology of the creative eye, Rudolf Arnheim

기억은 관찰자가 어떠한 대상을 개인적이고도 강한 욕구를 통해 일정한 지각특징을 가지는 대상으로 인식할 때 강하게 영향을 끼친다. 새로운 지각 경험은 기존하는 기억의 흔적들에 맞게 각색됨으로써 관찰자는 언제나 자신의 기억구조 전체를 보게 된다. 과거경험에 맞게 각색하는 것이다. 사건에 대한 경험을 사물에 대한 경험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지각이 아니라, 사건의 여러 가지 양상들이 하나의 일차원적인 순서로 의미를 가지고 차례로 이어지는, 하나의 조직된 순서를 목격하는 경험이다. 차례로 이어지는 사건이 잘못 조직되거나 불완전하면 그 순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단순한 연속발생으로 추락해 버리고 주된 특징을 상실한다. 그리고 그 단순한 연속성마저도 사건의 요소들이 간간이 보이는 동안에만 계속된다.


시간적 유대는 무질서를 연결 지어주지 않는다. 왜냐면 시간은 순서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순서가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나간 사건의 순서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어떤 사건들에 주의력을 집중할 경우, 마치 암실 속에서 고립된 하나의 밝은 사물이 주변의 공간과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못하듯이, 우리는 그 사건이 시간과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못함을 의식하게 된다. 만일 사건이 의미를 가진다 해도 하나의 조직된 맥락에서 보일 때와 같이 우리에게 충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사건의 비시간성은 그리 놀랄 게 못 된다. 어제의 특수한 지각표상과 감정들은 현재 우리들 속에 남아있는 찌꺼기 정도로 잔존하고 있을 뿐이다. 이 흔적들은 그 사건의 사전, 사후 마음속에 찍힌 다른 흔적들에 의해 부단히 수정되었기 때문에 처음의 경험과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음악이나 무용 작품처럼, 한 사건이 우리 안에 남겨준 흔적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그 사건의 경험을 이해해야 한다.     

          



루돌프 아른하임이 기술한 '기억의 공간성질(Spatial Character of Memory)' 즉, 기억의 공간적인 속성에 관한 부분은 <이터널 선샤인>의 중심에서 회오리를 일으키며 나를 삼켜왔다.


“당신을 알게 된 것을 후회해. 이런 아픔을 준 당신을 증오해! 그래, 지워버리고 싶어. 지금 고통이 사라질 수 있다면 모두 다 없애버리고 싶어. 일기장과 그림, 사진, CD, 기념품, 옷, 영화표, 편지들까지 몽땅 챙겨서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말 테야.”


그러나 완전히 지웠다고 해도 기름이 좔좔 흐르는 중국집의 만두 속과 같은 욕설과 사포처럼 거칠었던 다툼만이 아니라 어느 날 나누었던 입술의 부드러운 온기, 손바닥 아래 따끈한 감촉, 지표면을 울리던 엇갈린 발걸음, 꽁꽁 얼어붙은 강 위를 두드리던 낭랑한 웃음, 밤하늘 별들을 보고서 내지르던 흠집이 없던 맹세나 한가위 보름달처럼 반짝이던 약속을 어떻게 전부 걷어낼 수 있을까?


기억은 깊숙하게 숨어 있기에 남몰래 묻어둔 감정의 한 조각을 스치고 정신을 일깨운다. 흐릿한 점으로 표현되는 의지들은 당신을 지우길 거부한다. 추억의 명암을 새긴 시간은 사랑했던 우리 모습을 영원히 표류시킨다. 내 인생에서 너와 함께 한 순간들은 시간을 뒤죽박죽 만들고 현재의 공간을 엄습한다. 꿈에서조차 네 모습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파서 눈물을 흠뻑 흘렸는데, 어떻게 너를 잊는단 말인가!


“이 파우더로 모든 점을 지우는 거야. 화려하게 변신해서 보란 듯이 얼굴을 내밀어.”

“한번 새겨진 점은 여간 해서 타지 않아. 홈쇼핑에서 선전하듯이 깨끗하게 커버되는 얼룩은 단지 몇 시간의 지속에 불과한 속임수일 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수술하지. 완벽하게 시야를 만족시키기 위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건 뭔데?”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은 인간의 머릿속이 가장 궁금한 모양이다. 매번 뇌파의 탐험을 빠뜨리지 않는다. 자아의 성질과 영혼의 실존을 탐구했던 말코비치의 머릿속과 대마초에 취한 연인들의 환각 속,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아수라 백작처럼 두 얼굴을 지닌 복잡한 작가의 마음속을 돌며 실수를 거듭하는 사람들을 망각의 주스에 넣었다가 깨우침의 용광로에 굴리며 바닥으로 철저하게 무너뜨리기를 서슴지 않는다.


“거기 있으면 모든 게 지워지니 조심하세요. 소중한 것은 내버려 두고 창피했던 것들은 나와 함께 잊어버립시다. 자자, 시간이 없어요. 준비됐나요? 출발!”


건조하고 냉한 날씨에 정전기처럼 부푼 마음 한편이 짜릿하게 감전되었다. 왜 그렇게 떨리고 아프고 눈물을 흘리고 웃어버렸을까.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이었다. 덜렁거리고 엉뚱하고 욱하는 이 성질도 “오케이” 이 한마디로 눈감아줄 이 있다면 말이다.


"망각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게 함이라."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명언에 의지하지 않고 난 다시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한 순간이 지워지고 있어. 어떻게 하지? 당신과의 이 모든 추억이 지나가고 있어. 어떻게 해?”

“음미하는 거야. 이 순간을.”


우리에게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선사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과 같은 고통을 안겨주는 인생의 이야기와 소중한 기억들과 온갖 사건들의 전말은 쇠퇴해 가는 내 몸의 어딘가가 경험한 날들에 의존하고 있다. 아이들의 그림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기록하기보다는 습득했던 지식과 경험들을 재현한다는 연구도 있었듯이, 한낱 같아 보이는 단순한 인생들도 시공에 얽힌 각자의 경험에 의해서 순서가 재배치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아마 사랑 또한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흘러갈 거다. 자리를 뜨지 못하게 엔딩 크레디트에 말려 올라간 'Beck의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 이 노래처럼 우리는 언젠가는 배우게 될 것이다. 삶의 어느 순간에 서서 돌아봤을 때 아름답게 빛나던 그 순간들을!



"결백한 베스탈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에 잊혀진 채로. 오점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 각자의 기도는 받아들여지고, 각각의 소망은 포기되는구나." - 알렉산더 포프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Alexander Pope


2005. 11. 21. 月






SEOUL : 2024. 3. 17.  
PART I.  ETERNAL WORLD - 色卽是空

나는 영원과 절대에 대한 확신은 없다. 다만, 세월 속에서 빛이 환하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의 흐름이 보이긴 한다. 빛의 성질과 특성을 관찰해 보면, 빛의 확산이 있을 때는 눈앞은 밝음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빛의 수축이 다가오면 눈앞은 어둠으로 갈무리된다.


'ETERNAL'의 사전적 의미는 '시대의, 지속적인, 영구적인, 영원한, 끝없는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AETERNUS'에서 유래하며, '큰 나이'를 의미하는 'AEVITERNUS'와 인도-유럽어족의 뿌리인 'AEVUM', 즉, 생명력과 생명, 영원을 의미하는 '나이(AGE)'에서 기원한다고 전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동시에,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도 사용되는 개념인 'ETERNAL'은 영적인 '하느님'을 의미하는 명사로도 사용된 흔적이 있을 만큼 철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문화 예술사적으로도 인간이 영원히 추구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시간 속에 퍼져가는 빛은 어두움 속에서 사라져 있는가? 육신에 얽매여 있는 색(色)의 삼원색인 마젠타(Margenta), 노랑(Yellow), 청록(Cyan)을 합치면 검정이 된다. 그리고 정신으로 발산되는 빛, 즉 공(空)의 삼원색인 빨강(Red), 초록(Green), 파랑(Blue)이 모이면 흰빛이 된다. 결국 광원으로부터 받은 빛을 반사한 색이 ‘색의 삼원색’이라면, 빛처럼 고유한 파장과 진동수를 가진 ‘빛의 삼원색’은 각각의 광원이며, 태양이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불교사상인 '색즉시공(色卽是空)'과도 맞닿은 개념인 '색(COLOR)'과 '빛(LIGHT)'은 각각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공존하고, 함께 생을 가지며, 함께 진행되며, 함께 부서지며, 함께 소멸한다.


조금은 멀리서만 봐야 하는 생(生)의 진행은 생(生)의 한가운데 서 있을 때는 정작 볼 수 없다. 그리하여 내 안을 바라보는 관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필요하며 그 차가운 빛의 칼날에 당황하지 않아야 한다. 결코 살갗은 베일 수 없으나, 이미 내부에서 날카롭게 베어져 버린 진실은 우리의 육체를 넘어 저렇게 찬란하게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PART II.  영원(永遠) - ETERNAL RING

잠들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한동안 영원함에 대해 생각해 봤다. 사람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절대(絕對)'적인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시절, 영속적이고 불멸의 느낌은 존재하는지에 대해 사물과 사람과 공간과 시간을 바라보며 내 안을 응시했었다. 해가 떴고 창 밖이 밝아졌다.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자 영원한 햇살에 짙은 어두움이 찾아왔다.


한없는 지속을 의미하는 '영원(永遠)'은 가슴속 우리의 희망이소망이며 기대이다. 숨겨진 불빛을 바라보는 사랑이 꺼진다면 영원함은 어두움이 되고, 그것에 대한 의지가 살아있다면 어두움에서 불꽃이 피어오를 것이다.  


살다 보면 매듭 같은 한 마디가 있다. 그 언덕을 넘어가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시간을 넘기는 고비마다 나이테가 생기나 보다. 내 머릿속에도 나이테가 많이 생겼다. 그 무늬를 어루만지면 참을 수 없이 어느 순간들이 밀려 올라온다. 가볍게 지우기 어렵지만 거칠고 어긋난 삶의 무늬를 사랑해 줘야겠다. 그 어느 날의 오점까지도.




[PROMENADE AT SUNSET WALK] BEIJING. THE SUMMER PALACE.  2008. 1. PHOTOGRAPH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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