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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07. 2024

EN ATTENDANT GODOT

고도를 기다리며 | SHADOW PLAY, 기다림의 기억

"연극이란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다. 연극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야기이고,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연출가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



학창 시절, 정확히 대학 이전의 나는 한 놀음했다. 나의 삶은 모두 놀이(PLAY)였다. 꼬마 때는 웃음처럼 가벼웠고, 중학교 때부터는 점차 갈색으로 변해갔고, 고등학교 때에는 흩날리는 낙엽처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나는 한 편의 연극인 인생의 틀을 잘 알고 있었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정해진 삶에서 나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타서 위로 향하는 중이었다. 예고도 없이 언제 어디서 꺾일지 몰랐다. 그리고 탑승자로서 삶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을 때, 내 안의 어긋남과 달리 외부의 현실만은 비극으로 가는 것은 막고 싶었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까지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잘 노는 반항아로서 항상 놀이의 시간에서 주 참여자로 지목되고 했다. 나는 무대체질은 아니다. 낯을 파는 연기자는 전공이 아니었다. 당시 하이톤에서 음질이 가라앉는 변성기가 와서 높은 음자리는 힘들었다. 학교에서 서오릉으로 봄 소풍을 갔을 때, 반 대항으로 노래 부를 사람으로 지목되어서 난감했다.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 어차피 쪽 팔릴 거, 같이 노는 애들한테 나눠서 함께 부르자고 했다. 하여간 기억에는 다른 애들하고 부른 것 같다.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를 불렀나 보다. 스텝까지 췄으니 한 편의 코미디였다. 드넓은 잔디밭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승철이 [희야]를 부르면 꺅! 소리 질렀던 아이들이니까 트로트만큼 어색하면서 발랄한 우리들과 어울리지 않는 음악은 없었다. 나는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요무대에 환장하는 어른들이 항상 TV속에 틀어놓는 추억의 트로트나 요즘 신 아이돌로 나오는 트로트 영웅들의 대결도 귀에 와닿지 않는다. 흥겹지 않다. 무대 위에서 트로트를 부른다는 것은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그 공간을 희화화(戱畵化)는 내 나름의 반항적인 선택이었다.



임영웅, 사람들은 이 이름을 들으면 요즘 잘 나가는 트로트 가수를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임영웅을 '독립운동'하듯이 일생을 한국 연극에 바친 연출가로 기억한다. 극단 산울림의 수장이었던, 연출가 임영웅 씨가 지난 4일에 별세했다. 오늘이 발인이었다. 그는 나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다만 나에게 삶에 대한 고찰과 연극적인 감수성을 일깨워준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나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인생에서 참되게 기다려야 할 것에 대해 고민했었다.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대부, 임영웅이 만들어 낸, 한국판 사뮈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 | En attendant Godot 1969>는 부조리한 현실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회적으로 사회를 비꼬기에 알맞았다. 총도 등장하지 않고, 나쁜 놈도 등장하지 않고, 오직 고고와 디디나 다름없는 너와 나, 생존자 둘 만이 멍청하게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린다는 그 자체는 검열이 일상화된 우리의 현실과 들어맞았다. 흠잡을 데 없는 부조리한 현실에 부조리한 극은 절묘했다.



완성도 있는 한 편의 부조리극(Theater of Absurd)은 극단 산울림 창단의 밑거름이 되었다. 임영웅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비쉬에서 생긴 일 Incident at Vichy>, 최인호의 <가위 바위 보>,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의 <밤으로의 긴 여로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이강백의 <쥬라기의 사람들> 등 연극들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사재를 털어 1985년, 산울림 소극장을 설립한다. 여성 연극의 신 바람을 불러일으킨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위기의 여자 La Femme Rompue>,  드니즈 샬렘(Denise Chalem)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A Cinquante ans elle decouvrait la mer>,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자>, 강석경의 <숲 속의 방>,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의 다양한 작품들은 임영웅의 손을 거쳐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그는 1990년대와 2000년대, 국내외 소설들의 연극화를 실현해 내면서 연극계에 활발한 창작의 붐을 일으키는 한편, <지붕 위의 바이올린 Fiddler On The Roof>, <키스 미 케이트 Kiss Me Kate>, <갬블러 Gambler> 등 뮤지컬 또한 연출하면서 문화예술 공연계의 다양성에 이바지했다.



나는 연기자가 되는 것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예배시간 때 몰래 도망가서 대강당 뒤에서 연극하고 놀 때, 나의 위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다. 내가 원하는 표현의 세계는 연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학으로 넘어갈 때, 나는 문학적인 감수성이나 연극적인 태도는 버렸다. 나에게 드러난 실존적 현실은 상상보다는 퍽퍽했기 때문에 의식적인 자각이 푸르게 돋아날 무렵 날카로운 비수에 스스로를 베어버렸다. 세상의 비밀을 알고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은둔자꿈꾸었던 것은 날카로운 칼날이 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연극은 시간이 될 때면 보려고 했다. 연극을 보고 오면 에너지가 충만해졌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음성에서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문화공연의 세계는 뉴욕의 브로드웨이처럼 다양한 연극이나 뮤지컬이 활성화되는 현실은 아니다. 게다가 영화 <라라랜드 La La Land>에서 보듯이 나라를 불문하고 돈이 되지 않는 연극에서 구르면, 밥 먹고 사는 것은 별도로 고민해야 한다. 보아주는 사람도 적고, 기반시설도 부족하고, 지원은 택도 없고, 연기가 좀 되는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스크린과 자본이 흘러넘치는 OTT(Over-The-Top Media Service)로 넘어가니 소수로 만들어가는 광대짓은 힘들어진 것이다. 말만 근사한 K-문화육성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지 상반되는 현실 앞에 서 있다.


우리나라 연극계의 기둥이었던 임영웅 씨의 소천(召天)을 기원하며, 2003년 산울림 소극장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뒤, 2005년 1월 부조리하게 쓴 글을 올려본다. 




연극놀이 <고도를 기다리며>


어?’하면 ‘아!’하는 대답이 배치되기보단 ‘어?’하면 ‘어?’하고 말하는 부조리 극의 탄식 아닌, 탄식 섞인 대답들이 떠오르는 밤이다. 부조리극(Theater of Absurd). 냉철한 이성을 지닌 사회에선 미친놈들의 씨알부지소식이라며 무시할 만한데 고루한 풍자극의 형태는 마주 보기를 포기한 이기심 앞에서 등을 돌려버린 어법이 되었다. 


재작년 이맘때쯤, 친구와 함께 신이 저버린 고도를 기다렸다. 거지 발삼 차림의 두 남자. 소극장에서 울리는 늙은 배우들의 대화는 지평 너머 손을 뻗친 연기(演技)조차 조급하게 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을. 채찍과 당근에 휘말린 폭력과 서툰 서커스로 두 시간 반 남짓의 시간을 채운다 해도 빈말한 공간엔 허무가 징글맞게 가득하다는 것을. 


손뜨기를 하다가 심술궂은 상대의 장난으로 실이 엉키면 자리에 내려놓고는 나가 놀까? 하지만 뛰어나가 놀 문이 잠겨 있고, 앞의 녀석이 눈알을 굴려대면 분명 나는 이상한 행동을 할 것이다. 놀이도 못하게 매듭이 한가득 잡힌 뭉치실을 들고 가위도 없는데 손가락만 돌려대겠지. 


사뮈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를 책으로 읽었을 때는 단어 하나하나 섞인 상념이 밋밋한 수염을 말았다. 공중누각에 지어진 인간들의 더듬대는 말장난은 교감을 무시한 힘이 되어 머리를 갈겼다. 그리고 연극으로 보았을 땐, 엉킨 몸짓 자체가 답답함이어서 소태 된 눈물을 찔끔 저렸다. 



그런 것이다. 실존이란 것은! 

닫힌 성(城), 

짙은 연무, 

방황하는 발걸음, 

회의에 찬 심장!


그래! 

신이 고도를 저 버린 게 아니라, 

고도가 오지 않았던 게 아니라, 

고도는 지나간 거야. 


아님 그림자처럼 뒤를 밟고 있던지.

아무도 자신의 그늘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거든. 


그럼 고개를 돌려 내 그림자를 쳐다본다면 

고도는 자유에다 개줄을 씌워 데려올까? 


글쎄... 


아, 나는 왜 이리 

오래도록 뒤로 돌아가는 걸까? 

젠장 할, 앞이 안 보여!


회색 건물 안에서도 

여전히 욕심에 절어 절뚝거리는 그놈을 보곤 

나는 무슨 말을 한 걸까? 


뿌연 하늘과 

말라비틀어진 가로수와 

타르가 벗겨진 아스팔트가 

무슨 연극 세트장 같지 않은가. 


상대 배우들은 

우중충한 건물에 쳐 박아 두었지만 

그들은 고도를 모르고 기다리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멍청한 걸까? 

오지 않을 것, 

골난 눈을 휘적이며 

우둔하게 기다리니까 말이다. 


이상하게도 현재의 감동은 

죄다 지난 것들에 서렸다. 


난 현재가 무섭다. 

야망을 포기해서일까? 


무기력한 파 줄기가 되어 

흐느적거리는 두 다리. 

담쟁이넝쿨이 되어 누군가를 감아야 할까? 

그때서야 일어설 수 있을까? 


삶의 시간이 헛되이 흘러간다는 게 아깝다. 

뱀 쓸개를 혀에 두는 씁쓸함. 


사람의 목숨이라는 건 

가치여부를 막론하며 

논외의 장에 우뚝 서 있지만 

어떻게 그 생명을 운용하는 작태는 

이리 천하다는 말을 쉽게 끄집어내게 하는가. 



난 세트장을 빠져나오며 중얼댔다. 그런데 여전히 그곳에 서 있는 느낌, 왜 드는 건가? 


2005. 1. 18. TUESDAY




[無影 SILLUETTE : SHADOW PLAY] 2004. 10. 2. NOTEPAD. MEMENTO SKETCH by CHRIS


아무런 소리도 없다 

누구 하나 건드는 이 없다 
할 일이 없다 
나만이 있다 
그림자놀이


Silent shadows

No one touches

Nothing to do

Only me

Shadow play


2004. 10. 2. SATURDAY





“고도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기다려야 한다. 고도가 반드시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연출가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 2005, 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동감입니다. 선생님!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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