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TH in the line of the AGEDNESS] 2024. 2. SKETCH DRAWING & PHOTOSHOP by CHRIS
소중한 순간은 깨달았을 땐 이미 지나가버리고 붙잡고 싶은 사랑은 덧없이 사라져 간다. 기다릴 수 없기에 시간은 한없이 애틋하고, 후회 뒤의 그리움은 피보다 더 짙은 향기를 풍긴다. 땅과 가까워지는 순간에 가장 황홀한 젊음으로 치장하고 좋은 꿈 한번 크게 꾸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수상한 그녀>를 보고, <은교>의 이적요 시인이 슬프게 중얼거리던 축사를 떠올렸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As your youth is not a reward from your effort, My agedness is not a punishment from my fault."
이걸 진짜 시어도어 렛키 (Theodore Roethke) 시인이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박범신 작가는 롤리타 증후군인가? 후회도 많아. 여자는 싱그럽네.'
한참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이적요로 분한 박해일을 바라보며 어색한 노인 분장 뒤로 1999년이었는지, 2000년이었는지 세기말 밀레니엄(MILLENNIUM) 붐이 불던 그 시절,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연극 <청춘예찬(靑春禮讚)>으로 만났던 젊은 박해일을 떠올렸다.
우린 바람 불면 대학로에 가야 했다. 친구가 일 년 정도 대학로 소극장에서 조명기사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자주 놀러 갔었던 동숭로는 문화예술의 보고였다. 당시에는 문화예술계 업체마다 연합으로 문화카드를 남발해서 저렴한 비용으로 연극, 영화, 뮤지컬, 인형극, 무언극, 국극 등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온갖 배우들과 감독들의 집산지였던 대학로의 연극판은 영화보다 더 현장감 넘치고 감칠맛 있는 코스를 선사했다. 자유로운 대사와 극적인 열기, 삶에 대한 고백들. 그러나 관객을 두 세명, 많게는 열 명정도 놓고 세상의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을 보기가 얼마나 미안했던지 모른다. '극이 잘 되면 좋을 텐데. 배곯지 않을 테니.' 그래도 꿈이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지금 궤도에 올라와 있는 배우들을 볼 때면 다행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니까 그때 <청춘예찬>으로 돌아가보면, 박해일이 담배를 물고 불량스럽게 이야기할 때 목에서 기침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작은 소극장에는 환기가 되지 않아서 담배연기가 자욱해질 무렵 꾹 참으려고 했는데 목이 간질간질하더니 한번 터진 기침은 멈추지를 않았다. 기침과 욕설. 기침과 독백. 기침과 대화. 기침과 적막. 얼른 밖으로 나와 물 한잔 마시고 기침이 멈출 때까지 들어가질 못했다. 좌석에 돌아갔을 때 청춘의 이야기는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그저 희망차지 않았던 암울했던 분위기와 청춘이라는 단어와 위배되는 현실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막이 끝난 뒤 배우들과의 민망한 시선교환. 이후로 박해일은 목 안을 간지럽히던 따끔한 기침처럼 각인되었다.
<청춘예찬>에서 그렸던 청춘(靑春)은 이름만큼 파릇한 봄이라기보다 겨울로 접어드는 가을의 끝자락 같았다. 계절이 뒤바뀌어버린 듯한 역설처럼 전복된 현실이 사실이라고 담담히 서술했다. 그런데 <은교>에서는 세월을 원망하듯 미련스럽게 늙음을 뱉어내고 자신도 이미 거쳐갔던 시절의 젊음을 질투하고 있는 걸 보니 작가는 싱싱한 젊음이 부러웠나 보다. 부러워하면 지는 건데. 어차피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나이 듦에 대해 부쩍 생각한다. 칠팔십도 안 되었는데 죽음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연민도 들지 않는다. 죽음은 언제나 찾아올 수 있다. 갑자기 부지불식간에. 죽음이 특별하던가? 놀라워하다 보면 죽음에 눌려서 살기 어렵다. 죽겠다고 노래 부르는 노인네들이 죽음이 다가오면 제일 먼저 도망간다. 주변의 죽음이 많아지면 나이가 들어가는 거라던데, 오랫동안 주변의 죽음들에 무덤덤하여서 내 안의 그녀에게 물어봤다.
"살아있니? 넌 미동도 없어?"
우린 이전처럼 싱그럽지 않은 모습을 보며 슬퍼해야 할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거울을 보면 이미 예전 같지는 않다. 시간에 맞게 변하는 세상에 대해 가볍고도 진중하게 관조할 수 있기를.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보는 이의 몫보다 짊어진 이가 누릴 혜택이기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쉽게 말하여지기 어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