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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02. 2024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언어와 고통, 본능의 《논리 철학 논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논리 철학 논고,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What we cannot speak about we must pass over in silence.”

《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생각하는 힘이 아주 강했으면 좋겠다. 그 누구의 성벽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냉철한 세계의 통찰이 필요할 땐 남성적 자아가 수면 위에 떠오른다. 동시에 육체적인 욕망이 분출하면서 정신의 끈을 조정하는 또 다른 용기가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 속에서 운명이자 생명줄을 쥐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는데 그 순간, 현실에 놓인 나 자신의 위치나 존재방향이 모두 무상해지곤 한다. 간단히 내부에 다른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 인해서 현실과 분리되어 또 다른 현실로 삽입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지하지 못하던 나와는 자주 만날 수 없지만 짧은 순간의 만남만으로도 살게 되어야 하는 이유를 부여한다. 내가 ‘존재’ 해야 되는 것이 또 다른 ‘나’이자 ‘그’를 존속시키는 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비밀하고 신비한 존재가 있다. 발견에 있어 기쁨도 잠시, 그 존재방식을 연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과 아낌없는 희생을 퍼붓는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사물과 본질에 대한 태도이다. 나는 이런 모습에 회의적이다.


 "신비로움이란 사물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이 지적했듯이, 실제적 존재에 대한 응시를 잊고서 사람들은 외피에 달린 감각의 나이만 연장시키는 것에 집중한다. 나를 위해 투자하면서 우주의 동굴을 탐험했다 말하기엔, 존재로서의 말해진 형상을 보지 못한 자의 궤변이 아닐까 한다.



'언어 게임(Language Game)'. 언어로 말해지는 인생은 건축의 직조 방식을 상기해 보면 쉽게 감지할 수 있다. 평론(評), 학술(術), 논문(論), 소설(說), 시(詩), 극(劇), 철학(學), 연설(說). 무엇이든 염기서열수의 활자체계를 대입하여 삶의 조각을 엮어간다. 날실과 씨실의 짜지는 순간부터 공기가 포함되어 있듯, 의문과 의심이 함께 뭉쳐진 곳에서 기존의 토대가 쌓은 작업들을 ‘내버려 둔’ 채로 자아를 치료하는 철학은 명료한 기술로 표현하는 의식세계의 선구자들보다 독립된 실체로서의 자신을 찾게 하기에 그 매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몸에 깃든 혼령과도 비슷한 사고와 의도는 이미 관습과 제도를 통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지만 이것을 탈피하는 과정 또한 얼마나 모험적인가!


불과 재료, 기술과 혼으로 주조를 담당하는 연금술사의 가장 큰 비밀은 피와 땀과 정신이라 했다. 설령 조제의 비법은 전해지더라도 작자에게서 항상 동일한 작품을 끌어내지 못한다. 유사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도 그러하다는 일반화를 대입하여 각자가 겪은 고통을 둔감하게 만들긴 한다. 그러나, 표면에서 발생된 규칙은 이미 놓인 서술을 확인을 하는데 유용할 뿐, 신체가 담고 있는 영혼을 보여주기에는 곧 부족한 설명이 된다. 연필을 보고 '이것은 연필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돌고 돌아도 연필이라는 것을 부정하여 이득을 취할 곳이라곤 서술의 단지밖에 없으므로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연필을 쥐고 글을 적으면서 언어가 창조된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이들의 공유를 한번 생각해 보고 싶었다. 내 의식이 너와 같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삶의 틀이 같았다는 것을 한번 되짚어 보고 싶기도 했다.


말없이 의식을 탐구하고 그 안에서 꿈의 형상을 발견했다는 프로이트(Sigmund Freud)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추론 이전에 본능을 건드려보자고 했다. 한동안 눈만 감으면 꿈에 시달렸던 나로서는 그의 이야기가 반가웠다. ‘고통’을 언급하며 사회에 놓인 자아를 살펴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간과 공간의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처럼 귀먹고 혀가 잘리고 눈이 보이지 않아도 부유물이 되어버린 게임의 현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의 인생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비트겐슈타인. 잠잘 수 없는 밤, 왜 그가 떠오른 것인지, 아침에 다가올 유쾌하지 않은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저항인 건가.

2005. 3. 9. 水





[SILENCE: OUR DRIED VOICES] 2019. 4. 7.  PHOTOGRAPHY by CHRIS


숨 막히는 열기 속에서

긴 호흡은

갈라진 터널 속에서 흩어진다

메아리치는 묵음은

어떠한 소리를 건네는가

 

바닷거북의 등껍질을 닮은

갈색 구멍은

더 이상 물 마실 힘이 없다

 

가녀린 진실은 어둠에 묻히고 

파충류의 비늘을 닮은

물고기의 살갗은 붉게 타오른다


그때서야

탁-

건조하게 피어나는 소리

서성이는 눈동자 뒤로

서투른 발음이 시작된다



In the stifling heat,

Long breaths

scatter in the cracked tunnel.

What sound does

the echoing silence convey?


Resembling the shell of a sea turtle,

The brown hole

no longer has the strength to drink water.


The fragile truth

is buried in darkness,

Resembling the scales of a reptile,

The flesh of the fish burns red.


Then,

Tck—

The sound of dry blossoming.

Behind wandering pupils,

The clumsy pronunciation begins.




감정의 시간, 존재의 공간


무의식의 꿈은 요즘 멈춰져 있다. 피곤이 쌓인 육체가 더 이상의 여행을 거부하는 것 같다. 다만 혼자만의 시간에는 현재의 의식이 간간히 무의식으로 넘어가 있을 때가 있다. 잠시의 쉼이 되지 못하게 환상으로 겹치는 현실의 시간은 나를 내려놓기로 결정한 뒤로는 내 안의 존재들과 만남을 주선한다. 글을 적을 때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림을 그릴 때는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인지 그림자도 사라져 있다. 백지 위나 하얀 공간을 응시하고 있으면 이전에 읽은 글자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예전의 감정과 결합된 기억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오는 혼란인 듯 보인다.


공간 속의 어느 날이 기억나면 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두 장의 사진으로, 낱장의 글자들로 기억 속의 날들을 크로스체크하고 있다. 기억을 이야기로 풀 때 시간이 사라져 있으면 움직이는 주체는 살아있는 존재일까? 시간이 정확히 생각나지 않을 때 존재의 모습은 희미하다. 얼굴도 불확실하다. 시공의 세계에서 공간이 사라져 있으면 존재는 놓일 수 없다. 심상이 복잡해진다.




기억을 이루는 시간에 관하여


시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시간은 우리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육체적이고 물리적이며 가시적인 형태로서의 시간에 의지하여 삶을 살아간다. 해가 놓인 빛과 그림자, 물의 입출로 설명된 고대의 시간이나, 진공관에 가둔 빛을 디지털의 연산으로 표현한 현대의 시간처럼, 계산의 편리를 위해 초(秒 second/sec), 분(分 minute/min), 시(時 hour/h)로 설명된 것은 시간의 본체가 아니다. 이들의 군집인 일( Day), 월( Month), 년(年 Year) 또한 단순히 물리적인 사회가 제공하는 시간 개념으로는 설명될 없는 정신적인 관념과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사건들을 함유하고 있다. 과거(過去 Past), 현재(現在 Present), 미래(未來 Future)로 응축되는, 공간을 뛰어넘는 시간은 일직선을 넘어 감정과 함께 기억의 면적(面積 Area)을 구성한다.


육체에 새겨지는 경험이 축적되고 그 안에서 반응하게 되는 감정의 변화 속에서 시간은 블랙홀처럼 한 점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끊임없는 세포분열처럼 시간들의 순간들을 잘게 분화시키고 결합을 반복하며 온갖 우물 속의 기억을 끌어올린다. 하나의 홀씨가 열린 뒤 만개한 꽃처럼 펼쳐진 시간의 모양은 공간 속에서 다시 접히고 회전하여 하나로 돌아간다. 알듯 모를듯한 삶의 원리를 바라본다.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잊지 않기 위해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사고(思考)하고 응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어제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침잠한 고통 속에서 굵직한 소금맛을 감지하게 된다. "아! 아무 일도 없이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생활이 단조로워 절망한 것은 아니었구나." 진정한 역설은 카타르시스에 가장 빠르게 오를 수 있는 급행열차를 제공한다. 

2014. 1. 4. SATU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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