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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05. 2024

PHOTOGRAPHIQUE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나는 아직도 능숙하게 명제(命題)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냉엄한 실재 속에서 일반의지를 배반하는 현상들은 번복되어 왔고, 사람들의 대화가 진실보단 인사치레처럼 느껴진 이후 속사적인 의미가 지니는 진실성에 대하여 회의하게 되었기에. 나의 생각조차 랩이 돼버릴 수밖에 없는 굴절. 변화의 속도에 부적응한 채 악몽의 숨고리를 조금씩 낮춘다. 지금 나는 교착 지점에 있다. 완전한 탈피도 아니고 완전한 구속도 아닌 곳. 앞이 보이지 않는 낮은 굴다리에서 방황을 한다고 해도 희미한 불빛이라도 흔들어줄 지표가 필요하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밝은 방(Le Chambre Claire)》은 사건에 질린 파란 입술을 묶을 자동기술이다. 기억저장소를 뒤흔들 감광흔적에서 대상을 응시한다. 사진의 이미지에 관하여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남긴 담론은 두 세기를 공유한 시각적인 대리자로서의 사진에 쉼표를 끊었다. 미술과 같은 문지방을 밟지만, 사진은 안구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발자크(Honore de Balzac)나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가 두려워했던 영혼의 긁힘은 정지된 공간에서 헤엄치고 있는 존재의 사유가 행한 푼크툼(Punctum)의 결과일까? 난 상처를 받는다, 신경을 긁는 어떤 사진에서. 스투디움(Studium)으로서의 개괄은 영향력이 짧다.



"인덱스(INDEX)는 일종의 기호 또는 재현으로서 그 재현대상과 얼마간 닮거나 유사해서, 그리고 재현대상이 소유하는 일반속성들과 관련이 있어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인덱스는 한편으론 개별대상과 또 한편으론, 인덱스를 기호로 사용하는 사람의 감각이나 기억과 공간성을 지닌 역동적인 연관 속에 있기 때문에 대상을 지시한다."  《표지에 관한 글(Écrits sur le signe), 찰스 피어스 Charles S. Peirce



투명한 거울이 인사를 한다. 매끄러운 파편이 손바닥에 박혀버릴 만큼 말랑한 유제(寫眞乳劑: Photo Emulsion)가 뻣뻣한 얼굴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태양빛이 눈동자에 반사될 때마다 한 껍질씩 벗겨낸 인간의 영혼은 표피에 집중하는 의결식을 연다. 사물과 사물 속에서 내재한 기호의 의미는 개인마다 상이한 태도를 불러온다. 빛에서 드러나는 형체는 '무(無)에서 사물이 존재하는 기술'에 대한 검약인 것일까. 야망의 복제, 죽음에 드려진 극적인 시선. 팬터마임 배우의 분칠한 얼굴처럼 무심한 심리학적인 자국 속에서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귀로 확인할 수 있는 심장 박동수 정도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Epstein Krauss)가 기술한 사진에 대한 심령관상학인 《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Le Photographique : Pour une théorie des écarts)은 미술의 역사, 예술의 역사처럼 일반적인 개론서는 분명 아니다. 그녀가 현대적인 어휘로 정리한 담론은 듬성듬성 짜인 골격의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다. 48 프레임 가운데에 숨어있는 24 프레임의 검은 방. 암흑과 착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어느 날 감긴 눈이 떠진다. 막막한 고립과 연결 속에서 사람들은 연결 부분만을 쫓는다. 희미한 잔상과 실재를 투과한 모상이 만들어낸 환영을 그저 하나인 완결체로서 인식한 인형들은 복제기술을 자신의 눈꺼풀 속에 가둬둘 것이다. 지난 역사를 둘러보자. 단순히 그림으로 알고 있던 고대원시동굴은 인간의 활동을 담은 상상의 박물관이지 않은가.


“일 초 동안만, 이 순간을 앞서고 뒤서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열렬히 사랑하거나 갈구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의 말처럼 한 장의 사진은 순간의 기록으로서만이 아닌, 한 사람의 꾸준한 감정을 내포하는 언어이다. 순간이라 할지라도 잉여-의미의 존재는 선험적으로 기술해 있다.


시각언어로 표현하는 시대의 문화는 각자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인상주의와 빛의 나르시시즘, 화폭에 묘사하는 삶의 단면들은 빛을 포착하는 태양사냥꾼의 욕망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차갑고 거친 침묵을 간직한 내면의 불활성 물질을 텍스트로 부연하느냐, 갈고리로 긁느냐, 스카치테이프로 연결하느냐, 이런 방법의 서설이 다를 수 있어도 자기 응시라는 매체의 본질적인 속성은 언제나 낯설고도 매력적인 반영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변형의 과거를 보면, 깨진 거울조각을 욕망의 대상에 삽입한 피카소(Pablo Ruiz Picasso)가 있었고 하수구의 페티시즘을 욕설과 함께 콜라주한 로즈 셀라비(Rrose Selavy)의 다른 이름,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이 있었다.



인간은 희비극이 소용돌이치는 모순의 실천코드를 통하여 제도 속의 아카이브(Archive)를 풀려고 노력해 왔다. 대상에 대한 재현은 리얼리즘(Realism)의 구조를 잊지 않는다. 그것은 우발적이지 않는 숫자화된 일련의 기호, 한 나라의 언어가 암시하고 있는 문화적인 시사점을 개인적인 침전물의 자국들과 뒤섞어 여과시키며 비정형적으로 분열된 주체를 구현하기 위해 공통의 동의를 얻고 있던 암묵적인 세계들을 끌어당긴다.


가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한 인간의 활동은 하나의 시간을 잘라서만 평가할 수 없다고 말이다. 현실을 중계하는 사진과 그 중계를 생략한 그림을 본다. 우리는 심리적인 상처를 분출하면서 내부의 굴곡들을 성기게 짜깁기한 초현실주의(Surréalisme)의 자화상을 의도적으로 앞줄에 배치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부지런하게 색채를 사냥하는 야만의 눈들을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모습으로서 환기시킬 수 있을까!


나는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다섯 감각을 동원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이 오감 중에서 아직은 쇠퇴하지 않는 시각의 90% 이상의 인지를 활용하고 싶다. 결국엔 현실의 단편을 구성한 도큐먼트가 실상의 모방에 그칠지라도 데드 마스크를 쓰고 충동적인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가고 싶다. 무의식적 배치와 보충적인 파벌의 시각 테두리 내에서 은닉된 감정이 실증적인 주제로 표면에 부상할 때까지.



빛의 재배치를 통한 비구성의 메아리를 들어본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부연한 등가물(Equivalent)의 절단효과는 자연의 기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안에는 분할된 시간과 공간이 폭풍처럼 잠재해 있었다. 신비로운 규방을 뒤지듯 밤길을 사냥한 브라사이(Brassai)는 잠을 자는 객들의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언급하기도 했듯이 세계는 회전문을 끼고 있다. 내외부의 접합점을 이용하면 오늘의 폐쇄됐던 도시는 내일 개방도시의 명성을 차지할지 모른다.


혼돈하는 인간의 성좌에서 나는 상징적인 표식을 선택해야 할까? 증상을 응시해야 할까? 알게 모르게 숨어있는 사물에 대한 메타포는 음울한 게임을 계속하길 권유한다. 나는 돼지의 항문에서 속물들의 입을 발견하곤 한다. 암송아지의 늘어진 혀에서 숙성되지 않은, 방금 살해된 살코기를 연상하곤 한다. 하혈하는 마네킹의 다리에는 끈적한 배설물이 멈추지 않겠지. 시커멓게 산란된 여자의 하얀 머리칼은 기이한 불안감을 안기면서 내 목을 조여 온다.



“사진을 볼 때 나는 오직 감정을 통해서만 사진에 관심을 갖는다. 나는 그러한 감정을 질문으로서, 주제로서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처로서 심화시키고 싶었다. <....>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모든 젊은 사진가들은 현실을 포착하는데 헌신하지만 자신이 죽음의 중개자인 줄 알지 못한다. 종교의식이 쇠퇴하는 시대에 발명된 사진은 아마도, 현대 사회에서 비상징적인 죽음의 침입에 해당할 것이다. 종교와 관계없는, 제례의식과 관계없는, 문자 그대로 죽음 속으로의 몰입과도 같은 것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패러다임은 찰칵하는 단순한 소리로 귀결되며, 이 소리는 촬영할 때 최초의 포즈와 최종 인화지 속의 모습을 갈라놓는다.”

밝은 방(Le Chambre Claire),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롤랑 바르트가 언급했던 감정의 전이 즉, 프레임 속의 형태가 가져온 절대적인 시간의 강도는 침전된 재앙을 지금의 불편함으로 끌어낼 때 그 충격의 전율을 보다 진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날 것이든, 가공된 것이든 사진은 현실이 들어간 광기의 이미지를 주된 동력으로 삼는다. 그래서 말로 부족할 때 보아야 할 것이고, 보여주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회상을 해본다.


뜨거운 감각이 심장부터 발끝까지 전해진다. 다중노출로 겹쳐지는 화상들 속에서 모조와 진짜를 나는 알아볼 것이다. 심연을 두드리는 그 옛날 드높은 기적소리를 들으면서 무엇에 홀린 양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경험의 어색한 복사물은 매일 밤 거울의 방을 부시고 짓는다. 자기미로에 빠지는 것은 놀랍고도 현기증 나는 일이다. 자국은 기호를 남긴다. 그것은 서편으로 주고받던 고대 양피지기술처럼 해석에 있어 나의 피를 요구할 수 있다. 타락의 공포를 내지르면서 욕망이 뒤엉킨 거리를 걸을 때까지.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 금요일의 기록 중에서. 2005. 11. 4.





[THE CRACKS] 2005. 11. PHOTOGRAPH by CHRIS




공항으로 가는 길, 노리플라이(NO REPLY)의 [나의 봄]이 흘렀다.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

펼쳐진 하늘과 설레는 향기도

그대 없이 난 아무 의미 없는 걸

나의 봄은 온통 그대라오


거리에 사람들 웃음 가득하고

나른한 햇살 빛이 넘쳐도

그대 없이 난 아무 의미 없는 걸

나의 봄은 온통 그대 걸음 따라

나의 봄은 온통 그대라오.



예전 나의 머릿속을 열어보면 나의 그녀는 겨울철 시베리아 향기를 풍기는 딱딱한 얼굴의 나에게 세상 구경 가자고 놀러 가자고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은 너와 함께 갈게

차가운 균열에 바람이 분다

따뜻한 봄바람이

나직한 네 숨결이

쉼 없이 불어온다




조용히 응시하는 순간이 의식의 혈류가 가장 복잡한 정점에 있는 시간이다.


"The moment of silent gaze is the time when the bloodstream of consciousness is at its most intricate ap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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