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왜 박동훈에게 위로받았을까?
햇수로 3년쯤 전이다.
아내의 추천으로 한 드라마를 보게 됐다.
“이거 한번 봐.
좋아할 것 같아.”
사실 그전에도 아내가 밤늦게까지 이 드라마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내는 말했다.
“위로가 돼.”
그 말을 나는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 나서야 이해하게 됐다.
그 드라마는 바로
'나의 아저씨'였다.
이 드라마는 누군가 크게 성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떠올리며 세 편의 글을 써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박동훈이라는 직장인의 이야기 ― 우리는 왜 박동훈에게 위로받았을까.
두 번째는
이지안이라는 한 인간의 이야기 ―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구조 요청.
세 번째는 그 두 사람이 서로를 버티게 한 이야기 ―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순간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다.
단, 오래전 기억이라 정확한 대사가 아닐 수 있고,
나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해석이 담긴 것임을 미리 말해둔다.
박동훈은 구조기술사다.
남들이 건물 외벽의 화려함을 볼 때,
그는 건물의 뼈대와 그 뼈대가 견디고 있는 무게를 본다.
어느 날 밤,
이지안과 함께 걷던 퇴근길에 그는 무심한 듯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말을 건넨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건물에는 끊임없이 외력이 작용한다.
매서운 바람,
짓누르는 하중,
예상치 못한 충격.
우리 직장인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기한을 요구하는 상사의 압박,
내 성과를 깎아내리는 동료의 시기,
줄을 서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조직의 비릿한 정치.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 달려드는 외력이다.
하지만 동훈은 말한다.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진짜 이유는
그 하중을 견뎌내는 내부 구조,
즉 ‘내력’ 때문이라고.
드라마 속에서 동훈은 실제로
하위급 판정을 받은 위험한 건물을 점검하며 그 균열을 살핀다.
그 균열은 마치 마음의 상처를 입고 위태롭게 서 있는 지안의 모습이자,
동시에 억울한 뇌물수수 누명을 쓰고도 묵묵히 견디는 동훈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 대사가 흘러나올 때
나는 화면 앞에서 숨을 멈췄다.
출근길에서,
점심시간 옥상에서,
퇴근 후 혼술상을 앞에 두고.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나도 지금 무너지지 않으려고 내력을 다해 버티고 있는 중이구나.”
단순히 버티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 자체가 강함이라는 것.
박동훈은 그것을 기술자의 언어로 조용히 설명해 준다.
동훈에게도 거대한 외력이 닥친다.
그는 회사에서
뇌물수수 누명을 쓰게 된다.
이사 승진을 앞둔 청문회.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누군가는 의심하고
누군가는 이미 결론을 내린다.
억울함에 미칠 것 같은 순간.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는다.
묵묵히 버틴다.
그가 지안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만 아무렇지도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은 늘 우리를 흔든다.
소문으로,
시선으로,
말들로.
하지만 결국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 마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건물에
가장 치명적인 균열이 생긴다.
아내
강윤희의 외도.
그 상대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대학 후배이자 회사 상사인
도준영이다.
그 사실을 마주한 순간
동훈은 무너진다.
윤희가 무릎을 꿇고 울며 사죄할 때
그는 억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린다.
“너 나 가엾어서 어떻게 사냐?
난 너 불쌍해서 못 살겠는데!
나 그거 알면... 나 너 못 봐.
너 나 못 보고.
우리 아들, 어머니... 다 못 봐.”
그의 절규에는 분노보다
삶이 무너지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무너진다.
“어떻게 그놈이야... 어떻게 그놈이냐고!
그 새끼는 나 죽이고 싶어 하는 놈이야.
나 자르는 거 일도 아닌 놈이야.
네가 어떻게 그놈이랑!”
가장 믿었던 사람이
자신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과 함께했다는 사실.
그것은 외도 이상의 상처였다.
시간이 흐른다.
분노도 절망도
조금씩 지나간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식탁에 앉는다.
동훈은 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조용히 말한다.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 거? 인생 망가진 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면 돼. 그게 복수야.”
그는 “용서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같이 밥을 먹는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삶을 이어간다.
어떻게 그놈이냐고 절규하던 남자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무너진 식탁을 다시 세운다.
동훈의 하루는 종종
동네 술집 정희네에서 끝난다.
그곳에는
형
박상훈,
동생
박기훈,
그리고 후계동 선후배들이 있다.
망한 영화감독 기훈,
사업 실패 후 기훈과 청소 일을 하는 상훈,
각자의 사연으로 구겨진 채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
그들은 동훈에게
“오늘 회사 어땠냐”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기훈이 웃으며 말한다.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어.
망가져도 아무것도 아니야.”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았을 것 같은 동훈에게
그 말은 이상하게 큰 위로가 된다.
회사에서는 상무 후보라는 이름표로 평가받지만
이곳 문을 여는 순간 그는 그저
후계동 박동훈이다.
어느 날 밤
지안이 자신을 도청하며
자신의 삶을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동훈은 조용히 말한다.
“나를 아는 사람이… 반가워.”
나의 바닥을 알고도
여전히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
그 단순한 관계가
모함과 경쟁이 가득한 회사 속에서
동훈을 버티게 하는 진짜 내력이었다.
박동훈은 영웅이 아니다.
특별히 화려한 사람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버티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버팀에는
사람을 울리는 품격이 있다.
모함에도 무너지지 않고
억울함에도 사람을 놓지 않고
상처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를 보며 생각한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리고 그 버팀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다음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세상의 무게를
어린 시절부터 혼자 견디고 있던 한 사람.
바로
이지안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