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구조 요청 : 이자인이라는 사람의 버팀
드라마
나의 아저씨
두 번째 이야기다.
첫 글에서는
박동훈이라는 사람을 이야기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던 사람.
하지만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사람은
사실 따로 있다.
바로
이지안이다.
지안을 청춘이라 부르기엔
그녀의 삶은 너무 무겁다.
그녀는 너무 일찍
세상의 바닥을 배웠다.
지안은 늘 배고프다.
낮에는 회사 파견직으로 일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한다.
손님들이 남긴 음식이 얹힌 접시들이 밀려들고
지안은 설거지를 하면서도
주방 한쪽에 서서 음식을 먹는다.
누군가의 접시에 남아 있던
식어버린 음식들
한 입 베어 먹다 만
음식들
지안은 그 음식들을
살기 위해 씹는다.
그리고 조금 더 온전한 음식은
주변 직원들과 사장이 보는지 곁눈질로 확인한 다음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는다.
집에 있는 할머니에게
먹이기 위해서다.
훔친 음식이지만
그래도 따뜻한 음식이다.
지안에게 세상은
단 한 번도 친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안은
세상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억울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미 너무 오래
거절당해 왔기 때문이다.
밤.
불이 꺼진 집.
지안은
잠든 할머니를 잠시 바라보고 문 앞에 앉아
전기포트에 물을 끓인다.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가
어둠 속에서 작게 울린다.
믹스커피 봉지를 뜯는다.
배고픔이 밀려있었는지
세개의 봉지를 한번에 털어 넣는다.
뜨거운 물을 붓자
컵 안에서 진한 갈색 거품이 올라온다.
지안은
그 커피를 마신다.
그것은 커피가 아니다.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한
유일한 열량이다.
할머니와 나누지 않는다.
할머니에게는
레스토랑에서 훔쳐 온 음식이 있다.
하지만
이 달콤한 커피는
지안이 혼자 마신다.
왜냐하면
내일도 일해야 하고
내일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나를 울린다.
시청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믹스 커피 세 개 타 먹는 장면이
이렇게 슬플 줄 몰랐다”라고.
아마도 우리는
알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삶을 버티는 방식이라는 것을.
지안에게는
끝나지 않는 빚이 있다.
갚아도 갚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빚.
그 빚을 핑계로
사채업자
이광일은
언제든 그녀를 폭행할 수 있다.
지안은
우연히
회사 대표
도준영과 인연이 닿는다.
“박동훈 부장, 박동운 상무 둘 다
잘라줄게요.”
그 대가로 약속받은 돈.
이천만 원.
지안에게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지옥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탈출구였다.
지하철 안.
사람들 틈에서
지안의 손이 움직인다.
박동훈의
휴대폰이
그녀의 손에 들어온다.
그리고
도청 프로그램이 심어진다.
그날 이후
지안은
한 사람의 삶을 듣기 시작한다.
숨소리.
발걸음.
통화.
하루의 모든 순간.
약점을 찾기 위해.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도청은 지안에게 일상이었다.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비열한 기술이
지안이 세상을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수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박동훈의 숨소리를 따라갈수록
지안은 기묘한 균열을 느낀다.
이 사람은
참 이상하다.
회사에서는 모함을 당하고
집에서는 아내
강윤희의 외도를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
“아프면 병원을 가.”
"같이 가. 가서 고기 먹어"
세상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사람이
자기보다 더 위태로워 보이는
지안을 걱정한다.
그 무심한 목소리가
지안을 흔들기 시작한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귀하게 대접받아본 적 없는
지안의 얼음 같은 마음에
동훈이라는 이름의
햇빛이 스며든다.
그 순간
지안은 처음으로 깨닫는다.
이 사람은
지켜주고 싶은
첫 번째 사람이라는 것을.
지안은
도준영의 목소리도 녹음한다.
강윤희와 바람피는 이유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강윤희를 철저히 이용하는거 뿐이었다.
지안은
그 녹음 파일을 들고
윤희를 찾아간다.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재생 버튼을 누른다.
녹음이 끝났을 때
윤희는 무너진다.
자신이 믿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고
결국은 그저 남편을 파괴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
그리고
더 잔인한 사실.
동훈이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선다.
지안이 이 진실을 폭로한 이유는
증오가 아니다.
단 하나.
박동훈이
더 이상 혼자 아파하지 않기를.
할머니 봉애를 요양원으로 입원시키고 돌아온 길.
지안과 동훈은 나란히 버스에 오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지 않는다.
동훈은 앞쪽에, 지안은 몇 발자국 뒤쪽에.
덜컹거리는 버스 안,
거리를 가로지르는 소음 외에 두 사람 사이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지안은 창밖 대신 앞자리에 앉은 동훈의 등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 등은 화려하지도, 강인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무게를 다 짊어진 듯 고단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평생 혼자서 할머니를 지키고,
매질을 견디고,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지안에게
그 등이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하게 다가온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생색내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앞장서서 길을 터주는 사람.
지안은 버스 안에서 조용히 깨닫는다.
자신의 거칠었던 인생에도 처음으로 '어른'이 생겼다는 것을.
기대어 울지는 못해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진짜 어른이 생겼음을.
할머니
이봉애가 돌아가신 날.
지안은 박동훈에게 전화를 한다.
“아저씨…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잠시 뒤
동훈이 나타난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후계동 사람들.
동훈의 형
박상훈.
동네 아저씨들.
한 명.
두 명.
세 명.
사람들이
장례식장으로 들어온다.
빈소는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찬다.
고물상 할아버지가 문상을 오신다.
그리고 동네사람들로 가득한 장례식장을 보며
지안에게
"할머니가 복이 있으시다"라고 말을 한다.
빚쟁이를 피해
지안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엄마를 대신해
꽃다발을 챙겨주고 같이 사진을 찍어준
고물상 할아버지
지안에게 공간을 내어 주었던 할아버지도
이제 마음이 놓인다.
혼자였던 지안에게
가족이 생긴 것을 보았다.
지안은 늘 배고팠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희망도 없었다.
그래서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한 사람을 만나면서
지안의 인생은
조금씩 달라진다.
세상이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외롭다.
그런데도
지안은 다시 살아간다.
왜냐하면
이제 알기 때문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무너질 때
조용히 등을 내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사람이 다시 나를 살게 만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