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평안에 이르렀는가[至安]?

- '나의 아저씨'가 남긴 위로(3)

by 오피스 사가Saga

이 글은 나의 아저씨 마지막 이야기다.

하지만 이 글은 단순히
한 드라마를 회상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어쩌면 이 글은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해 쓰는 글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질문을 남기고 싶다.

사람은 무엇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가.

돈일까.
성공일까.
명예일까.

아마 그것들만으로는
사람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사람을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은
어쩌면 훨씬 작고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숨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

“같이 가. 가서 고기 먹어.”


잘못 배달된 5천만 원


어느 날
박동훈의 사무실로
퀵서비스 하나가 도착한다.

보낸 사람도
주소도 없다.

봉투 안에는
짧은 메모가 한 장 들어 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아래
5천만 원 상당의 상품권.

평범한 직장인이
평생 정직하게 벌어도
손에 쥐기 쉽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동훈에게 그 봉투는
기회가 아니었다.

재앙이었다.

그 순간을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파견직 직원
이지안.

그날 밤
상품권은 사라진다.

지안이 훔친 것이다.

사채업자 이광일에게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진다.

지안은 결국
그 상품권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리고 그 봉투는
감사팀에 들어간다.

그 결과

박동훈에게 씌워질 뻔했던
누명은 벗겨진다.

서로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던
그 돈 봉투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인생을
처음으로 연결시킨다.

그 후
둘은 술잔을 마주한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 서로 잘 안되길 빌어주자.”


이상한 사람


지안은
대표이사 도준영의 사주를 받고
동훈을 도청하기 시작한다.

도청은
지안에게 생존이었다.

하지만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동훈의 숨소리를 듣다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정말 이상하다.

회사에서는 모함을 당하고
집에서는 아내 강윤희의 외도를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도
증오하지 않는다.

그리고
늘 지안을 마음에서 안쓰러워한다.

동훈은
지안을 이렇게 말한다.

“그 춥게 입고 다니는 애, 이쁘게 생겨가지고…”

세상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사람이


자기보다 더 힘든 사람을
걱정하고 있을까.

그때 지안은 깨닫는다.

이 사람은
도청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고기 먹고 가”


사람들은 지안을
유령처럼 취급했다.

파견직.
살인 전과.
가난.

그녀를 설명하는 말들은
늘 차가웠다.

그래서 지안도
세상에서 한 발 떨어져
살고 있었다.

회식이 있어도

아무도 지안을 챙기지 않는다.
러나, 박동훈이 말을 건넨다.

“같이 가. 고기 먹고 가."

정말 별것 아닌 말이다.

하지만
지안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누군가가
조직원으로 인정하고

소속감을 느끼게한 말.

그건 단순한 회식에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너도 여기 있는게 당연한 우리 직원이다."


투명인간 같던 존재를
사람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그날 이후

지안의 세상은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착하다”


지안의 할머니
이봉애.

말을 하지 못하고
몸도 자유롭지 않다.

지안에게는
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지안의 모든 것이다.

어느 날
할머니는 말한다.

달이 보고 싶다고.

지안은 마트에서
카트를 훔친다.

카트를 끌고
비탈진 골목을 달려
할머니를 태운다.

그 모습을
뒤따라오던 동훈이 본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착하다.”


세상은 늘
지안을 나쁜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동훈은 말한다.


“착하다.”


그 말 하나가

지안의 세계를
조용히 바꾸기 시작한다.



지안의 삶을 알게 된 날


지안이
도준영의 사주로 동훈을 도청한 사실이
밝혀진다.

지안은 도망치다
사고를 당한다.

갈 곳이라곤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봐준
할아버지

서춘대뿐이다.

혈연은 아니지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지안과 할머니를
묵묵히 지켜온 사람.

열이 펄펄 끓는 지안을 보며
춘대는 동훈에게 연락한다.

부리나케 달려온 동훈.

지안은 그를 보고 놀랐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아저씨는…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어요…”

그리고 동훈은
춘대에게 지안의 삶을 듣는다.

사기를 치고 떠난 엄마.

말 못 하는 할머니 밑에서 자란 어린 지안.

할머니를 괴롭히던 사채업자를
칼로 찔러 죽인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
그 사채업자의 아들
이광일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해온 삶.

이 이야기를 들은 동훈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말한다.


“존경합니다.”


지안을
여기까지 키워낸
서춘대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를 대신해 울어주는 주먹


동훈은
지안이 광일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광일을 찾아간다.


“나도 너 같은 놈 보면 죽여버리고 싶을 것 같아.”


평생 주먹 한번 제대로 써본 적 없을 것 같은
고지식한 부장.

하지만 그날
동훈은 물러서지 않는다.

피가 터지고
바닥을 구르면서도
악착같이 달려든다.

그건
지안의 삶이
너무 가여웠기 때문이다.

도청으로

이 소리를 듣던 지안은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대신 화를 내주는 일.

지안에게 그것은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지안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그날
지안은 동훈에게 전화한다.

하지만
지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후계동 사람들이
장례식장으로 온다.

문상객으로.

그리고
상주로.

그들은
손님을 맞고
밤을 지킨다.

그날 지안은 깨닫는다.

이 사람들이
이제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을.

장례식장에서

정희가 말한다.

“우리 일 년에 한 번씩 보자.”

지안에게
처음 생긴 약속이다.

그리고 서춘대도
서춘대가 말한다.

“할머니가 복이 있으시다.”

아마 그 말은
떠난 할머니에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지안이
이제 평안해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지안(至安)
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평안에 이른 사람.


시간이 흐른 뒤


시간이 흐른다.

도준영은
교도소로 간다.

박동운 상무는
다시 본사로 복귀한다.

박동훈은
상무로 승진한 뒤
회사를 떠난다.

그리고 창업을 한다.

부장 시절 함께 일했던
대리와 과장들.

그 팀원들을 데리고
새로운 회사를 만든다.

한편 지안은
삼안이엔씨 회장의 도움으로
부산에 취직한다.

그리고
일을 잘해
서울 본사로 올라온다.



재회


서울의 어느 점심시간.

지안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밖으로 나가 보니
동훈이 있다.

동훈이 웃으며 말한다.

“일 잘한다며? 이야기 들었어.”

“언제 서울 왔어?”

그리고 말한다.

“나 이제 사장님이야.”

잠시 웃다가 덧붙인다.

“팀원들 다 같이 있어.
한번 놀러 와.”

잠깐의 침묵.

그리고 동훈이 말한다.

“우리 악수할까?”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예전에
술을 마시며 말했었다.

“우리 서로 잘 안되길 빌어주자.”

그렇게 말했던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의 행복을 확인한다.


당신 인생의 ‘박동훈’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도
어딘가에

후계동 같은
골목이 있었을까.

힘들 때
“고기 먹고 가”라고 말해주던 사람.

아무 이유 없이
집까지 같이 걸어주던 사람.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때
“착하다”라고 말해주던 사람.

혹시
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버티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당신 인생의 박동훈은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지금,

혹시
누군가의 삶에서

당신이 그 사람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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