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전두광과 '미생' 성대리로 보는 조직의 민낯
조직에서도 같다.
실력이 쌓이고 책임이 커질수록 사람은 신중해지고,
말은 줄어들며, 대신 해결책이 늘어난다.
반대로
속이 비어 있는 사람일수록 고개를 치켜든다.
그리고 말한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위험합니다.”
“나중에 문제 됩니다.”
“저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면 절대 안 됩니다.”
겉으로는 조직을 걱정하는 충신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말에는 ‘대안’도 ‘책임’도 없다.
이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말’로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조직의 발전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이 목적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소위 말하는 ‘내로남불’이다.
그리고 리더가 이들을 방치할 때,
조직은 조용히 병들기 시작한다.
이들은 늘 신중한 얼굴로 말한다.
“지금 추진하면 리스크 큽니다.”
“전례가 없습니다.”
“감사에 걸릴 수 있습니다.”
기업에서는 ‘리스크 관리’라는 이름으로,
공공기관에서는 ‘규정’과 ‘감사’를 앞세워
실행을 멈춰 세운다.
물론 규정은 필요하다.
감사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진짜 원칙주의자는 다르다.
규정을 해석해 가능한 길을 찾고
감사 기준 안에서 실행 방법을 설계하며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
반면 책임 회피형 인간은
규정을 ‘금지 목록’처럼 사용하고
감사를 ‘공포’로 활용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가장 안전한 길로 만든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문제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그러나 정작 묻지 않는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 발생하는 피해는 누가 책임집니까?”
고객의 불편,
시민의 고통,
조직의 기회 손실보다
자신의 책임 회피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더 위험한 부류는
일의 타당성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이미지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다.
이들은 업무 대신 ‘프레임’을 만든다.
“저 사람은 인성이 나쁩니다. 부서 운영에 반영하셔야 합니다.”
“능력은 잘 모르겠고, 융통성은 확실히 부족합니다.”
“팀워크를 해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중한 인사 검증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일의 성과와 논리는 외면한 채,
사람의 성향과 이미지에 프레임을 씌워 리더의 판단을 흐리는 전형적인 정치 행위다.
능력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작업에 가깝다.
이 모습은
영화 '서울의 봄 ' 속
전두광의 권력 장악 방식과 닮아 있다.
전두광은 원칙과 소신을 중시하는 군인
이태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비하한다.
“공부만 한 놈.”
“앞뒤 꽉 막힌 놈.”
업무적 판단이나 역량을 따지지 않는다.
대신 인격적 이미지를 깎아내려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의 기준은 단 하나였다.
“우리 편이 아니면 배제한다.”
육사 기수와 파벌,
자신과의 친소 관계가
능력보다 우선했다.
심지어 그는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참모총장을 ‘시해 사건 연루자’로 몰아세운다.
확실한 증거보다
‘의혹’이라는 프레임으로 사람을 공격해
판단 자체를 흐려버린다.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대신
사람을 무너뜨려 판을 장악하는 방식이다.
조직 내 정치형 인간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말한다.
“저 사람은 일은 잘할지 모르지만 조직에 위험합니다.”
실력은 인정하는 척하면서
‘위험인물’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운다.
그 순간 판단의 기준은
‘일을 맡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저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로 바뀐다.
능력 있는 실무자는 배제되고,
말 잘 듣는 사람만 살아남는다.
전두광이 이태신의 강직함을
‘융통성 없음’으로 몰아붙였듯,
정치형 인간들은
동료의 실력을 ‘문제 요소’로 둔갑시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 결과,
조직은 무기력해진다
'미생'의 성대리는 무능하지 않다.
업무 흐름을 정확히 알고,
보고 라인을 읽을 줄 알며,
사내 정치의 작동 방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책임지지 않는다.
그의 본질은 단순한 태만이 아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을 ‘소모시키는 사람’이다.
후배 한석율이 밤새워 만든 기획안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 쓰고,
문제가 터지자
태연하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다시 확인했어야지.”
성과는 위로 가져가고,
책임은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식.
그의 행동은 늘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첫째, 실무를 ‘육성’이라 포장하며 떠넘긴다
“이게 다 너 가르치려고 그러는 거야.”
“현장의 메커니즘을 익혀야지.”
온갖 잡무와 책임을 후배에게 전가하면서
성장을 위한 배려인 척 포장한다.
둘째, 자신의 부당함을 ‘조직의 관례’로 둔갑시킨다
“회사는 원래 이런 곳이야.”
“조직생활이 다 그렇지.”
정당한 문제 제기를
‘철없는 이상론’으로 몰아붙이며
항의를 무력화한다.
셋째, 대안 없이 기획을 난도질한다
“논리가 약해.”
“설득력이 부족해.”
“다시 해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비판의 목적이 완성도 향상이 아니라
주도권을 쥐기 위한 압박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말한다.
“이게 다 회사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하지만 그의 비판은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과 입지를 위한 계산에 가깝다.
익지 않은 벼는
자신의 뻣뻣함을 ‘강직함’이라 우기고,
자신의 비어있음을 ‘시스템의 한계’라 비난한다.
성대리가 바로 그런 인간이다.
이런 유형은 조직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단 한 명만 있어도
팀원들의 정신적 에너지를 갉아먹고,
성취감을 무너뜨리며,
도전할 의욕을 꺾기에 충분하다.
리더가 이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충돌이 피곤하고
시끄러운 사람이 부담스럽고
‘쓴소리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더의 침묵은 신호가 된다.
“비판만 해도 안전하다.”
“책임지면 손해다.”
“사람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
그 순간,
일하는 사람은 떠나고
말하는 사람만 남는다.
조직은 실행력을 잃고
냉소주의가 문화를 지배한다.
계륵이 아니라 독이다
이들은 흔히 이렇게 평가된다.
“말은 많은데 틀린 말은 아니야.”
그래서 내치지 못한다.
하지만 현장의 평가는 명확하다.
이들은
동료들의 의욕을 꺾고
실행 속도를 늦추며
책임지는 사람을 고립시키고
조직 전체를 냉소에 빠뜨린다
함께 일해야 하기에 더 괴롭고,
변하지 않기에 더 치명적이다.
계륵이 아니다.
조직의 심장을 잠식하는 독이다.
리더십의 해법은 분명하다.
리더가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대안은 무엇인가?”
“그 책임을 당신이 질 수 있는가?”
사람이 아니라 ‘일’로 평가한다
규정과 감사는 회피 수단이 아니라 실행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 질문이 작동할 때,
비난하는 자는
책임지는 조언자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조직은 결국
‘누가 말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책임지느냐’로 결정된다
익지 않은 벼는
고개를 들고 바람에 요란하게 흔들리며
주변을 끊임없이 건드린다.
그러나 익은 벼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열매로 증명한다.
지금 조직을 흔드는 사람은 누구인가.
책임지지 않는 비난가인가?
규정을 방패로 숨는 사람인가?
사람을 공격해 판을 흔드는 정치가인가?
그리고 리더는 묻고 있는가.
“그래서 당신이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사라진 조직은
반드시 무너진다.
일하는 사람이 버티지 못하고,
말하는 사람들만 남기 때문이다.
리더십은
사람을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다.
책임지는 문화를 끝까지 지켜내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