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지 않은 벼의 착각. 그리고 조직이 필요한 리더의 세 가지 얼굴
나는 작은 규모의 공기관에 몸담고 있다.
하지만 조직 안의 공기는 단단하지 않다.
성과보다 불신과 비난이 먼저 쌓이고,
협력보다 눈치와 침묵이 익숙해졌다.
2년 전, 구성원의 공감 없이 단행된 조직개편은
갈등이 폭발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은
‘조직을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편한 사람’으로 남았다.
해결은 미뤄졌고,
대신 뒷말과 책임 회피가 자리를 채웠다.
그 결과 조직은
서로를 소모시키는 곳에 가까워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이 과연 우리 조직만의 문제일까.
규모와 업종이 달라도
많은 조직에서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책임지지 않는 자리,
대안 없는 비난,
기준이 흔들리는 결정.
그래서 이 글은
특정 조직에 대한 불만을 말하려는 기록이 아니다.
무너진 리더십이 어떤 조직을 만드는지 돌아보고,
그 속에서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진짜 리더의 모습’을 찾기 위한 고민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조직을 병들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은 하지 않으면서 비난만 하는 사람,
책임은 피하면서 영향력만 행사하는 사람,
사람을 공격해 자리를 지키는 정치형 인간들.
그들은 겉으로 보면 ‘계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직의 심장을 잠식하는 ‘독’에 가깝다.
그 글을 쓰고 난 뒤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렇다면
그 독이 퍼지는 동안
리더는 어디에 있었는가?
조직의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구조 변화,
충분한 설명 없는 결정,
그 과정에서 쌓여온 불신과 오해.
어느 순간 사람들은
문제 해결보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먼저 묻게 되고,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는
비난과 의심만이 떠다닌다.
그리고 결국
모든 조직이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진짜 리더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제
그 질문에
막연한 비판이 아니라
분명한 답을 말해보려 한다.
방패가 되어주는 리더 ; '미생'의 오상식
조직에는 앞선 글에서 묘사했던 ‘성대리’ 같은 사람들이 있다.
성과는 교묘하게 가로채고, 책임은 무겁게 아래로 던지는 사람들.
말로는 후배의 성장을 위한다 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만 빠져나간다.
그런 조직에서 구성원이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나를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신뢰, 그 믿음이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
영업 3팀의 오상식 차장은 바로 그런 리더였다.
“우리 애”라고 불리던 순간
드라마 초반, 낙하산 인턴으로 들어온 장그래는 회사에서 철저히 주변인이었다.
벌도, 경력도, 인맥도 없었고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시선 속에서 매일을 견뎌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 부서의 실수로 장그래가 억울하게 공문서를 분실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타 부서 과장이 장그래를 거칠게 몰아붙이자,
술에 취한 오상식 차장은 그 과장에게 달려가 분노를 터뜨린다.
“이 자식아! 우리 애가 좀 혼날 수도 있지, 왜 남의 애를 기를 죽이고 그래!”
평소 장그래에게 독설을 퍼붓던 그였지만,
외부의 공격 앞에서만큼은 장그래를 ‘남’이 아닌 ‘우리 애’라고 불렀다.
그 한마디는 장그래가 처음으로 조직 안에서 보호받는 존재임을 느낀 순간이었다.
책임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는 뒷모습
문제가 커져 윗선의 질책이 쏟아질 때도 오상식 차장은 팀원을 앞세우지 않는다.
“제 관리 소홀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성과는 팀원에게 돌리고, 비난의 화살은 자신의 자리에서 막아내는 사람.
부하 직원의 실수를 능력 부족이 아니라 리더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가 있었기에 장그래는 무너지지 않았고 끝내 자신의 몫을 해내는 ‘완생’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진짜 리더는 권위를 내세워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구성원이 비바람에 젖지 않도록 가장 앞에서 대신 비를 맞아주는 사람이다.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군내 사조직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군사 반란의 긴박한 시간을 다룬다.
혼란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침묵을 선택한다.
승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태신 소장은 달랐다.
반란군이 서울로 진입하고
지휘 체계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약탈당하고 있는데
나보고 가만있으라는 건가?”
승패가 아니라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먼저 붙잡는다.
반란 세력이 회유 전화에도
그는 단호히 말한다.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
타협의 언어를 거부하고
행동의 정당성을 먼저 묻는 태도.
영화 중 최고의 명대사로, 불의와는 타협조차 하지 않겠다는 그의 '원칙'이 드러난다.
수적 열세 속에서도 홀로 다리 위에서 반란군(제2공수여단)의 진입을 막아서는
행주대교 바리케이드 장면에서는
"너희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부대로 복귀하라!"
고 외치는 장면은
힘이 아니라
명분과 기준으로 조직을 지키는 모습이다.
결전을 앞두고도 그는 말한다.
“군인으로서 직무의 정당성을 지키려 할 뿐이다.”
결과가 아닌
과정의 정당성을 선택하는 리더.
조직이 무너지는 순간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질 때입니다.
모두가 침묵할 때 말하고,
모두가 타협할 때 기준을 붙드는 사람.
이태신은 이길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옳은 선택을 하는 리더였다.
조직이 병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비난이 해결보다 쉬워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공격하고 탓하는 일은 빠르고 통쾌하지만,
얽힌 문제를 풀어내는 일은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노숙은 그 고통스러운 설계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오나라의 군주 손권(孫權)을 보좌하며,
조조(曹操)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기 위해 유비(劉備)와의 동맹이라는 큰 판을 설계했다.
제갈량(諸葛亮)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보다 앞서
‘천하이분지계(天下二分之計)’를 제시했을 만큼 정세를 읽는 눈도 탁월했다.
단도부회(單刀赴會) — 전쟁 대신 해법을 택한 용기
유비 측이 약속했던 형주를 돌려주지 않자
오나라 내부에서는 "유비를 쳐야 한다", "우리가 속았다"며 감정적인 비난과 전쟁론이 들끓었다.
이때 노숙은 단 한 자루의 칼만 지닌 채 적진으로 들어가 관우(關羽)를 직접 만난다.
“지금 우리가 싸우면 가장 이득을 보는 자는 조조입니다.”
결국 그는 전면전을 막고 동맹을 유지하는 합의를 이끌어낸다.
비난 대신 해법을,
대립 대신 조정을,
감정 대신 구조를 먼저 본 사람.
노숙은 조직이 나아갈 큰 그림을 설계하는 리더였다.
나는 내가 속한 조직의 치부를 단순히 고발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들춰내고 비난하는 일은 의외로 쉽다.
적당한 분노와 약간의 냉소만 있다면 누구나 '날카로운 비평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난의 언어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무너진 조직도,
상처 입은 사람도,
깨진 신뢰의 조각도
그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비난의 언어를 거두고,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 리더의 조건’을 기록하고 싶었다.
방패가 되는 사람: <미생>의 오상식처럼,
성과는 팀원에게 돌리고 비난의 화살은 자신의 넓은 등으로 받아내며 "우리 애"를 지켜내는 리더.
기준을 지키는 사람: <서울의 봄>의 이태신처럼,
모두가 승자의 편에 서기 위해 침묵할 때 홀로 바리케이드를 치며 직무의 정당성을 묻는 리더.
해결을 설계하는 사람: <삼국지>의 노숙처럼,
배신과 분노라는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공존'이라는 거대한 판을 짜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드는 리더.
리더는 명함에 박힌 직함의 이름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나는 '태도'의 이름이다.
리더십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사람들을 공동의 방향으로 정렬시키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는 마인드셋의 집합이다.
조직 내에 '익지 않은 벼'들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세치 혀로 비난을 일삼을수록,
우리는 더욱 선명한 기준을 가진 리더를 갈망하게 된다.
리더의 도덕적 성품과 일관된 원칙은 무너진 조직의 신뢰를 다시 세우는 유일한 주춧돌이 된다.
조직의 봄은 날카로운 비평가들의 합창이 아니라,
묵묵히 고개 숙여 알곡을 채우고 동료의 비바람을 대신 맞아주는
'진짜 리더 한 사람'의 뒷모습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