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指鹿爲馬),
그리고 입방아는 사실이 된다.

조직에서 사람답게 살아남는 법 - 두 번째 이야기

by 오피스 사가Saga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말이라 부르는 순간


중국 진나라 말기, 권력자 조고(趙高)는 황제 호해(胡亥) 앞에 사슴 한 마리를 끌고 와 말했다.

“폐하, 이것은 말입니다.”

황제가 의아해하자 조고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떤 이들은 “사슴입니다”라고 답했고,
어떤 이들은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사슴이라 말한 사람들은 숙청되었고,
말이라 말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이 사건이 바로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고사성어의 유래다.

이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하다.

사슴과 말의 구분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권력과 집단이 결합하는 순간
사실보다 ‘해석’이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벌어지는 지록위마(指鹿爲馬)


조직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낯설지 않다.

나는 고객에 초점을 맞추어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내가 고객이라면 무엇을 원할까,
고객을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과연 내 보고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질문들을 놓지 않으며 맡은 일을 꾸준히 수행했고, 업무 기준에 따라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던 어느 시점부터 조직 내 의사소통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부 구성원들의 감정적 반응이 반복되었고,
상하간 비공식적인 의견 전달이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나에 대한 인성에 대한 평가들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말들,
몇몇 사람의 입방아,
확인되지 않은 해석들이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결과였다.

조직에서 평판은 이렇게 형성된다.

크게 외친 한마디가 아니라,
작게 반복된 말들이 결국 현실이 된다.


조직은 왜 이렇게 움직이는가?


이 현상은 개인의 악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한 집단 심리의 작동 원리가 있다.


1. 집단사고 (Groupthink) : 조직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의견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하는 현상

2.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 : 한 번 형성된 인식은 그에 맞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다른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

3. 침묵의 나선 (Spiral of Silence) : 다수 의견과 다르면 사람들은 점점 말하지 않게 되는 현상

4. 에코 챔버(Echo Chamber) : 비슷한 생각끼리만 소통하며, 내부의 해석이 반복되어 사실처럼 굳어지는 것


특히 에코 챔버가 형성되면
다른 목소리는 점차 들리지 않게 되고,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조차
의심되지 않는 “공통 인식”이 된다.

결국 조직에서는
진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이 차단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

결국 조직은 이렇게 움직인다.

진실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말할 사람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럼에도 남아 있는 힘


하지만 조직은 단일한 공간이 아니다.

내편에서 응원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묵묵히 지지의 신호를 보내는 동료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는 생각보다 크다.

조직에서 살아남는 힘은
항상 권력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때로는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는
작은 공감에서 비롯된다.


인사권이라는 현실의 벽


여전히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남는다.

조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평판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다.

인사권이다.

지록위마의 시대에도
문제는 사슴과 말의 구분이 아니라
누가 생사를 결정하느냐였다.

내가 경험한 조직도, 지금 근무하는 조직은 더더욱

지록위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기록이 향하는 곳


돌이켜보면

나의 태도가 지나치게 원칙적이었거나

특정인들의 뒷말처럼 능력 부족이었을 수도 있고,
조직의 맥락을 충분히 읽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아직은 모르겠다.

나 스스로 고백을 해 보고 싶다.

“나는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조직은 왜 그렇게 움직였는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그 질문을 따라가는 과정이다.


결국 남는 질문


조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슴을 사슴이라 부르는 용기와
말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이 기록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같은 벽 앞에 서게 될 누군가에게
단 한 가지를 말해 주기 위해서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묻고 싶다.

지록위마의 조직에서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이
정말 존재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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