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서 고성이 오간다.
기획팀은 실행력을 탓하고, 실행팀은 기획의 비현실성을 공격한다.
그 사이에서 리더가 말한다.
“둘 다 일리가 있네. 적당히 양보해서 합시다.”
이 말은 배려가 아니다.
판단을 포기한 선언이다.
나는 이 장면을 수없이 봤다.
그리고 안다.
이 한마디가 조직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리더가 판단을 멈추는 순간,
조직은 ‘라쇼몽의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좋은 리더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왜 우리는 계속 판단을 회피하는가, 그 불편한 질문을 꺼내기 위해서다.
나는 20대 후반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해,
이제 반백살을 갓 넘겼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1년에 200장짜리 명함을 1~2통씩 쓰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다.
하나의 사실은 결코 하나의 이야기로 남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감정이 아니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
공감과 결정은 다르다는 것.
그걸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작품이 있다.
2022년 방영되어 큰 공감과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며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것보다도
“저렇게 판단해야 한다”라는 그녀의 의지에 더욱 공감했다.
그런데 왜 현실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진실을 왜곡하는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이 현상에는 이름이 있다.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
1950년,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Rashomon)>에서 유래했다.
숲 속에서 벌어진 하나의 사건.
사무라이는 죽고, 그의 아내는 능욕을 당한다.
그리고 네 사람이 등장한다.
산적,
아내,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
나무꾼
그들은 모두 진술한다.
하지만 내용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놀랍게도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세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현상의 핵심은 단순한 기억 오류가 아니다.
자기 정당화다.
기억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구성되고
관점은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며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된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기획은 실행을 탓하고, 실행은 기획을 탓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둘 다 불완전한 진실이다.
이 현상은 특히
누군가 떠나거나 조직이 흔들릴 때 극명해진다.
한 조직이 흔들리고 누군가 그 자리를 떠날 때,
라쇼몽의 안개는 가장 짙게 피어오른다.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각자의 진실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능력의 한계’를 말하고,
누군가는 ‘정치적 결과’라 평하며,
또 누군가는 확인되지 않은 거짓을 덧붙여
‘그럴 줄 알았다’며 소문을 확신시킨다.
시간이 흘러 사실이 드러나도
안개는 쉽게 걷히지 않는다.
이미 한 번 믿어버린 이야기를
사람은 쉽게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자신의 판단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해석을 덧붙이며 스스로를 설득한다.
나는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라는 것.
그래서 라쇼몽은 영화 속 사건이 아니라,
우리 조직 안에서 매일 반복되는 현실이다.
이때 리더가 “둘 다 맞다”라고 말하는 순간,
문제는 더 커진다.
그 말은 균형이 아니라
책임 회피이기 때문이다.
조직은 잘못된 신호를 학습한다.
진실보다 목소리가 중요해지고
원칙보다 정치가 앞서게 된다.
결국 구성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크게 말하면 이긴다.”
이것이 조직이 무너지는 방식이다.
이제 다시 그 드라마로 돌아가 보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우영우는
피고인의 사정에 가장 깊이 공감하는 인물이다.
드라마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의 이야기로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법정에 서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을 보게 된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70대 할머니가 치매를 앓던 남편을
다리미로 때려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검찰은 ‘폭행’이라는 행위와 결과에 집중했고,
사람들은 ‘노부부의 비극’이라며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이미 결론은 내려진 듯 보였다.
동기가 무엇이었든,
무거운 다리미로 머리를 때린 이상
살해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때 우영우는 전혀 다른 것을 본다.
피 묻은 다리미가 아니라,
그 할머니가 남편을 얼마나 오랫동안 돌봐왔는지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모두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낸다.
“피고인은 남편을 죽일 의도가 없었습니다.
남편의 사인은 외상성 뇌출혈이 아니라,
지병인 고혈압으로 인한 자발적 뇌출혈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법정의 공기가 바뀐다.
우영우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대신 방대한 의학 기록을 뒤져
사건 이전부터 이어진 증상들을 연결하고,
사인의 원인을 하나씩 논리로 증명해 낸다.
마치 거대한 고래 한 마리가
막힘없이 바다를 가르듯,
그녀의 논리는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한다.
"법은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음에 따라 죄명이 바뀝니다.
죽일 마음이었다면 살인미수죄,
다치게 할 마음이었다면 상해죄,
좀 때려 줄 마음이었다면 폭행치상죄,
그냥 실수였다면 과실치상죄입니다."
결국 재판부는 판단을 바꾼다.
살인미수가 아닌 ‘상해’.
그리고 집행유예.
감정이 아닌 ‘팩트’가
한 사람의 인생을 다시 정의한 순간이다.
이 장면을 보며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가 처음 내렸던 판단은
사실이 아니라
감정의 결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여기서 비로소 드러난다.
우영우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기준에 의한 판단이었다는 사실이.
이 지점이 중요하다.
공감은 인간의 태도이고
판단은 리더의 책임이다
리더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지만,
결정은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
“누가 더 힘든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이 질문이
라쇼몽의 안개를 걷어낸다.
하지만 판단만으로는 부족하다.
법원의 판결문이 긴 이유는 단 하나다.
패소한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왜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왜 이 결론이 선택되었는지
끝까지 설명한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된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리더의 결정은
설득되지 않으면 실패한 결정이다.
사람은 결과보다
기준과 과정에 납득할 때 받아들인다.
“내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지만,
공정하게 결정되었다.”
이 확신이 생길 때
비로소 조직은 다시 움직인다.
설득 없는 결정은
또 다른 라쇼몽을 만든다.
영화 <라쇼몽>의 마지막에서
나무꾼은 버려진 아기를 데려간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책임을 선택한다.
이 장면이 말해준다.
인간은 왜곡될 수 있지만,
그래도 선택은 할 수 있다.
리더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진실을 알 수는 없어도
방향은 정해야 한다.
리더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선택을 미루는 것도 결국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는 말해야 한다.
“당신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조직의 기준은 이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간다.”
이 한 문장이
라쇼몽의 안개를 걷어낸다.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를 끝까지 붙잡고 생각했다.
"우리는 왜, 알고 있으면서도 판단하지 못할까."
답은 단순하다.
틀릴까 봐가 아니라,
책임지기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을 찾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리더는 그 사이에서
“둘 다 맞다”는 말로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 순간,
조직은 이미 방향을 잃는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판단이 아니다.
기준에 따른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진실은 흐려질 수 있다.
사람의 말은 언제든 갈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길로 간다.”
그 한 문장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조직은 비로소 안개를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