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몰입하는가
“우리가 태어난 것도 운의 일종이다.”라는 말은 당연해 보이면서도 충격인 말이었다. 놀이와 인간의 저자인 로제 카이와는 아곤과 알레아의 개념을 사용해서 우리 인간의 생명 탄생도 운과 경쟁의 일종으로 본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특히 4가지 개념의 혼합을 흥미롭게 읽었다. 아곤(경쟁을 뜻하는 개념), 알레아(운을 뜻하는 개념), 미미크리(흉내, 모방 의태를 뜻하는 개념), 일링크스(중독을 뜻하는 개념)를 혼합하여 여러 예시를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이 4가지 개념을 보고 우리 주변의 여러 가지 예시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이비 종교는 단순히 생각하면 일링크스처럼 보인다. 무엇인가 일상에 심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일링크스말고 아곤의 개념도 숨어있다. 사이비 종교에도 계급들이 있기 때문에 아곤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이다. 또한 높은 계급까지 올라가는 것이 단순히 아곤의 개념으로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교주의 맘에 들거나 높은 계급의 추천으로 운 좋게 차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알레아의 개념도 숨어있는 것으로,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을 여러 방식으로 심취하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연애 프로그램인 나는 SOLO의 경우는 단순한 연애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넘어서 4가지의 개념 모두가 적용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나는 SOLO』에서 참가자들은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부여된 이름’으로 생활한다. 예를 들어 "광수"는 보통 브레인이나 다소 괴짜 성향을 지닌 남성에게, "옥순"은 예쁘거나 조건이 좋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의 고정된 이미지는 참가자에게 자연스럽게 역할극의 성격을 부여한다.
이는 카이와가 말한 미미크리, 즉 연극이나 게임 속에서 배역을 맡아 몰입하는 놀이와 유사하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본모습을 숨긴 채, 이름이 주는 ‘역할’ 속에 들어가 관계를 형성하고 갈등을 경험한다. 이러한 설정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시청자에게도 더 큰 몰입감을 준다. 또한 아곤의 성격도 띄고 있는데, 여러 명의 여자 남자가 다대일로 데이트를 하면서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를 쟁취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시스템도 있기 때문이다. 외모, 대화능력, 감정 표현 등 연애에서의 능력이 평가되는 장이며, 그 속에서 참가자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비교하며 우위를 점하여 한다. 또한 짧은 시간에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끔 조장하기 때문에 단체로 일링크스 상태로 있는 것이다. 출연자들은 그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며 단체로 더 심취한 상태로 경쟁하게 된다. 24기 영식의 경우가 옥순에게 빠져 중간에 울거나 화내는 경우가 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랜덤 데이트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남녀가 한명씩 공평하게 사람들을 알아가게 하는데, 여기에는 알레아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더욱 재미를 주기도 하였다. 알레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출연자도 있었는데 25기 순자의 경우가 그렇다. 내 여자다 싶은 사람의 손을 잡아서 그 여자와 남자는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순자가 마음에 들어하는 상철과 손을 잡고 싶어서 순자는 손을 숨기거나 밑으로 가는 등의 행동을 하였다. 이 경우 알레아를 거부하고 아곤을 개입하여 랜덤데이트라는 의미를 퇴색하였다. 놀 이는 놀이에서 정한 룰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위, 즉 카이와가 말한 '놀이의 타락'에 해당한다. 그 결과 순자는 프로그램의 핵심 정신을 훼손한 것으로 간주되어 시청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로제 카이와의 놀이 이론을 통해 나는 SOLO를 바라보면, 현대인의 연애와 감정, 관계의 본질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단순한 연애를 넘어 인간존재의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구조를 다시금 목격하게 된다.
아곤의 경우 스포츠 또는 E스포츠를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알레아의 경우 복권이나 주사위 게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미미크리의 경우 코스프레나 연극의 예시를 들 수 있다. 일링크스의 경우 댄스 또는 패러글라이딩도 포함이 된다.
하나의 취미가 여러 유형의 놀이 요소를 동시에 지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RPG게임의 경우, 미미크리(역할놀이)+아곤(경쟁과 전투)+알레아(운)의 요소를 모두 가질 수 있다.
전 세계 수많은 팬들이 기다리는 롤드컵(League of Legends World Championship)은 단순한 e스포츠 대회를 넘어선 문화적 축제이자 현대인의 놀이 무대다. 이 거대한 이벤트를 로제 카이와의 놀이 이론, 즉 아곤(Agon), 알레아(Alea), 미미크리(Mimicry), 일링크스(Ilinx)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석하면, 그 복합적인 매력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롤드컵의 본질은 단연 아곤, 즉 경쟁이다. 각국의 대표팀들은 몇 개월간의 훈련과 전략 수립을 통해 무대에 오른다. 선수들은 피지컬, 두뇌 플레이, 심리전, 팀워크 등 모든 면에서 경쟁한다.
2023년 롤드컵에서 보여준 T1과 JDG의 대결은 그 대표적 사례다. 전략적 픽 밴, 정밀한 한타 교전, 그리고 순간 판단력의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 규칙 안에서의 기술 겨루기는 바로 아곤의 전형이다.
비록 롤드컵은 실력 중심의 대회지만, 완전히 예측 가능한 세계는 아니다. 픽 밴 단계에서의 상대 전략을 오독하는 상황, 바론 스틸과 같은 극적인 장면들은 경기의 판도를 뒤집는다. 이런 예측 불가능한 요소는 카이와가 말한 알레아, 즉 우연성과 운의 놀이로 해석된다.
선수들이 아무리 치밀한 전략을 짜도, 게임 내 변수와 타이밍은 때때로 행운 혹은 불운이라는 얼굴로 다가온다. 롤드컵은 실력 중심이지만, 이런 작은 알레아 요소가 종종 극적인 전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롤드컵은 단순한 게임 그 이상이다.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를 영웅처럼 소비하고 몰입한다. "페이커"라는 닉네임은 이제 한 명의 게이머가 아니라, 롤 전설의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또한, 선수들 역시 소환사 명(ID)을 통해 일종의 가상 인격을 형성하며, 그들이 조종하는 챔피언과 하나가 된다. 롤 세계관 속 서사, 스킨, 애니메이션도 이러한 미미크리적 상상력을 뒷받침하며, 경기 전체를 극적인 무대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롤드컵이 가지는 강렬한 현장성과 시청 경험은 일링크스, 즉 감각적 도취의 놀이로 설명된다.
치열한 교전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 한타 순간의 긴장감, 그리고 승패가 갈릴 때의 감정 폭발은 관객의 감각을 뒤흔들며 일시적인 몰입과 전율을 선사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을 '보는 것'이 아닌, 감각과 감정으로 함께 '경험하는 것'이다.
카이와의 놀이 이론으로 본 롤드컵은 단순한 경쟁을 넘어선 종합적인 놀이의 장이다.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 일링크스 이 네 가지가 유기적으로 엮일 때 우리는 단순한 게임 이상으로서 롤드컵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 실감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무대에 열광하고, 기다리며, 다시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SOLO, 롤드컵, 그리고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로제 카이와가 설명한 놀이의 네 가지 개념 아곤(경쟁), 알레아(우연), 미미크리(모방), 일링크스(감각 도취)를 살펴보았다.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이 세 현상은 모두 인간이 일정한 규칙 안에서 경쟁하고, 운에 기대며, 특정 역할에 몰입하고, 강렬한 감각적 경험에 빠진다는 공통 구조를 지닌다. 이는 놀이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간 삶을 구성하는 심층적인 구조이며, 인간의 행동과 감정, 사회적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유효한 틀임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현실 속에서 수많은 놀이를 창조하며 살아가고 있고, 때로는 그 놀이에 몰입한 나머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어떤 놀이에 몰입하고 있으며, 그 놀이 속에서 자유로운가, 혹은 지배당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