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달팽이 정신이 뭔데?
달팽이처럼 먹은 것을 그대로 내보내는 사람이 강하다고 느낀다. 감정을 그대로 삼켜서 그대로 내보내는 것은, 아마 감정을 회피하며 아예 감정에 대해 편식하는 사람보다 더 강하다고 느낀다. 감정을 통과시키는 것은, 결국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삼키고 그대로 내보낸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고,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이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이다. 또한,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유연하게 흘려보내는 태도이다.
느리고 부드럽지만 자기만의 껍질을 가지고 있고, 위협받으면 귀엽게 껍질 안으로 도망간다. 도망가는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해볼만한 상대면 더듬이같은 눈을 부라리며, 나름대로 맞써 싸운다. 나는 손가락으로 툭툭쳤을 때, 달팽이가 나에게 맞써 싸우려는 것을 보고 놀랍기도하고 내가 만만한가 생각하며 충격을 먹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관리하려고 한다. 조절하거나, 억누르거나, 무시하거나, 표현을 참는다. 그것이 성숙한 것이라고 사회는 가스라이팅한다. 하지만 달팽이를 보고 우리는 배워야한다. 감정을 정직하게 통과시키는 것은 고차원적인 성숙함이라고 생각이 든다. 스스로에게 감정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만큼 단단한 사람. 그것은 감정을 회피하는 사람보다 강하다. 억누르는 사람보다 부드럽다. 감정에 휩쓸려다니는 사람보다 나은 것 같다.
강함은 덤덤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강해 보이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강함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달팽이 정신으로 살자. 원래부터 덤덤한 사람보다 강하다. 우리는 덤덤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방식으로 강해지면 되니까.
혀와 이가 대결을 한다. 혀는 상처를 입고, 이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는 온데간데없다.
비슷한 용례로, 오뚝이가 있다. 오뚝이를 흔드는 사람이 강해 보이나, 오뚝이는 계속 일어난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일어난다. 결국 쓰러뜨리는 쪽은 제풀에 지쳐 포기하게 된다.
달팽이 정신도 비슷하다.
원래 강한 사람은 어쩌면 감정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일 수 있다. 덤덤한 사람은 감정을 그저 멀리서만 바라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그에 비해, 달팽이 같은 사람은 감정을 직면하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사람이다. 당근을 먹으면 소화를 하고 당근을 돌려보내고, 상추를 먹으면 상추를 돌려보낸다. 소화는 했지만, 직면했지만, 완전히 흡수해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적당적당히 하는 달팽이들. 잘하고 있다. 그대로만 하시라.
달팽이가 강한 이유가 더 있다. 달팽이는 느리고 연약해 보이지만, 자신의 속도와 방식을 끝까지 지키는 존재이다. 거기에는 타인의 기대나 세상의 속도에 맞춰 자신을 억지로 바꾸지 않는 삶의 태도가 있다. 달팽이는 힘을 숨긴 존재이다.
느린것의 여유로움, 방어할 수 있는 집을 가진 것도 정말 매력적이다. 달팽이는 느리지만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고, 타인의 시선에 맞추려 하지 않는다.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자신만의 속도가 있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그것은 단순히 느린게 아니라 자기 속도에 대한 확신과,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경계가 있는 삶이다.
빠름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자기 속도를 고집하는 것은 자기 선택권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달팽이가 방어할 수 있는 껍질을 가졌다는 것은 세상과 나 사이에 건강한 선이 있다는 것이고, 나만의 회복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회복 공간은 정말 중요하다.
나태주 시인은 행복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이것은 달팽이 정신에 완전히 부합하는 시이다. 여기서 노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회복 공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취미나 삶의 위안을 주는 존재에 대한 아름다운 한편의 시이다.
감정을 느리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공간에서 천천히 소화하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휘둘리지 않고, 흔들리더라도 다시 껍질 속에서 중심을 잡을 줄 안다. 그것은 얼마나 단단하고 우아한 모습인지 세상은 모른다.
달팽이는 자신을 보호하는 점액 덕에, 칼날 위도 느릿느릿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느림과 자기 몸에서 나오는 점액. 자기만의 방식이 결국, 달팽이를 살린다.
달팽이의 존재는 짱이다. 달팽이 영상을 보았다. 달팽이를 들어올려 상추에 올려주는 장면이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추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밥을 먹고 싸는 것. 새끼를 낳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도 달팽이 정신으로 살자.
누구를 이기려 하지 않는다. 무리해서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삶.
여기가 어딘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장소와 맥락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먹고 싸고 번식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생존을 의미한다. 달팽이 정신은 결국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다.
잘난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사랑을 하고, 잘 자는 삶. 그것은 인생의 전부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