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항공기가 피하지 못한 이유
2002년 스페인에서 열린 유네스코 청소년 축제에 러시아 바시키르 자치공화국의 청소년도 선발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혼란의 10년을 보냈다. 새로운 지도자 푸틴이 집권해 조금씩 안정되고 있다. 해외여행은 꿈같은 기회다. 8세에서 18세 사이 청소년 44명과 보호자 5명이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처음부터 꼬인다. 우파시에서 모스크바로 상경한 버스는 엉뚱한 공항에 도착하는 바람에 예약한 비행기를 놓쳤다. 러시아에서 49명이 스페인으로 떠날 수 있는 항공기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운이 좋았던 걸까. 이틀 뒤 전세기를 구할 수 있었다. 7월 1일 밤, 바시키리안 투폴레프 Tu-154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학생 단체 49명과 다른 승객 8명, 조종사 5명, 객실 승무원 4명, 비번 승무원 3명, 총 69명이 탑승했다.
Tu-154는 2002년 시점에서도 구식이지만, 1995년 생산된 바시키르 2937편에는 TCAS와 같은 최신 기술이 반영되어 있다. 기장, 교관 기장, 항법사, 항공기관사, 부기장까지 다섯 명이 조종석에 앉았다. 기장 알렉산드르 그로스(52세)가 조종하고, 교관 기장 올레그 그리고리예프(41세)가 감시비행을 한다. 부기장 무라트 이쿨로프는 점프석에 앉았다. 늦은 밤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바시키르 2937편은 36,000피트로 상승해 순항하고 있다. 달도 없어 여느 때보다 새카만 밤하늘이다.
중부 유럽시간 23시 30분. 뮌헨 지역 관제사는 취리히로 관제를 이양한다.
이날 밤. 취리히 관제 공역은 한 사람이 담당하고 있다. 36세의 관제사 페터 닐슨이다. 드문 일은 아니다. 주변 대부분의 공항이 오후 11시에 문을 닫는다. 주간에는 두 명이 근무하다 생갈렌, 프리드리히스하펜 두 공항으로 오는 마지막 비행기가 착륙하면 다른 한 명이 쉬러 간다. 23시 15분 관제사 한 명이 휴식을 취하러 갔고, 10분 후에는 인턴도 퇴근했다.
이 날은 평소와 다르다. 공역 분할 방식이 변경되어 메인 관제 컴퓨터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메인 컴퓨터의 기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메인 컴퓨터는 레이더에 뜬 기체의 비행 계획이 자동으로 나온다. 두 기체가 너무 가까이 붙으면 충돌표시도 한다. 관제사 닐슨은 이런 내용을 모른다. 거기에 더해 업데이트 중에는 관제 센터와 직통 통화도 끊어진다. 닐슨은 이것도 모른다.
한편, 보잉 757 화물기인 DHL611편이 이탈리아 베르가모를 출발해 벨기에 브뤼셀로 향하고 있다. 기장 폴 폴립스 47세. 부기장 브란트 캄피오니 34세. 경험 많은 조종사다.
21:20
611: 취리히 레이더. 안녕하세요. DHX611입니다. 26000피트로 상승해서...
DHL611편이 취리히 관제 공역에 들어왔다.
한 가지 일이 더 생긴다. 비행이 지연된 항공기가 밤늦게 프리드리히스하펜 공항에 착륙하러 오고 있다. 접근 관제는 닐슨의 주 임무가 아니다. 쉬러 간 관제사를 불러야 할까. 단 한 대의 항공기를 위해서? 닐슨은 공항 관제탑에 전화를 걸어 인계하려 한다. 직통 전화가 끊겨있다. 닐슨은 유선 전화를 건다.
닐슨: 말씀하세요.
T**?: 엑스젯6497편 관제 중이죠?
닐슨: 네. 접근 중이네요.
T**?: 네. 부탁합니다.
조금 바빠진다. 닐슨은 DHL611편에게 다시 요청한다.
닐슨: 뭐라고 하셨는지 못 들었습니다.
닐슨: 엑스젯6497. 라인 주파수 120.93으로 연락하십시오.
EXS6497: 라인 주파수 127.93으로.. 정정합니다. 120.93으로 연락.
타이 항공기가 온다.
933: 콘트롤. 타이933편입니다. 안녕하세요.
닐슨: 타이933, 안녕하세요. 트라자딩엔에서 알고이 지점으로 진행.
닐슨: 타이933, 들리십니까.
933: 아.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닐슨: 트라자딩엔에서 알고이로 진행하십시오.
933: 트라자딩엔에서 알고이로,
닐슨: 탱고, 로미오, 알파에서 알고이입니다.
933: 라저. 탱고, 로미오, 알파 후 알고이.
닐슨: TAR4575, 트레조로 직행하십시오.
4575: Trezzo로 직행합니다. 감사합니다.
DHL611
611: 스위스 레이더. DHL611 수평 비행 중입니다.
닐슨: DHL611. 호출부호를 7524로 하십시오.
611: 7524, 611.
닐슨: DHL611. 레이더에 인식되었습니다. 32000피트로 상승해 탱고 골프 오스카로 직행하십시오.
611: 라저. 32000피트로 상승. 탱고 골프 오스카로 직행. 가능하면 36000피트로 추가 상승 요청합니다.
닐슨: 라저. 4,5분 뒤 알려드리겠습니다.
611: 감사합니다.
3분 뒤 추가 상승 지시를 한다.
닐슨: DHL611. 36000피트로 상승하십시오.
611: 36000피트로 상승합니다.
바시키르2937편 조종사들은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항공기를 발견한다. 달이 없어 시야를 방해받지 않는 하늘에선 깜박거리는 충돌 방지등이 먼 거리에서도 보인다.
바시키르2937편, DHL611편, 관제사 닐슨은 같은 주파수 대역 128.050에 있다. 눈에 보이는 항공기를 서로 대화하며 피해 가는 게 상식적이지 않을까. 한 기체가 조금 올라가고, 한 기체가 조금 내려오면 되는 간단한 일상적인 일이다.
Tu-154와 보잉 757에는 TCAS라고 하는 안전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인근 항공기의 트랜스폰더에서 송신하는 고도, 속도, 방향 정보를 수신해 항공기 진행과 비교한다. 경로가 너무 가까워지면 충돌 방지 시스템이 작동해서 서로 반대되는 해결 권고를 내린다. 한 항공기는 상승하고, 다른 항공기는 하강하도록 한다.
그리고리예프 교관이 멀리 깜박이는 757을 발견했다. 거리는 10마일 이상 멀기에 아직 충돌 방지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경고 시스템보다 노련한 조종사의 눈이 더 빠르다.
그리고리예프 교관: 여기엔 고도차가 제로라고 표시됩니다.
교관은 TCAS 표시에 표시된 고도차이를 알려준다.
23:34:24
DHL611편은 아직 바시키르2937편을 발견하지 못했다.
캄피오니 부기장: 실례하겠습니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부기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18초 뒤 TCAS 경고가 나온다.
Traffic. Traffic.
필립스 기장은 같은 고도로 미확인 기체가 접근하는 걸 확인했다. 경고가 나온 뒤 해결 권고가 나올 것이다. 상승일까, 하강일까. 필립스 기장은 TCAS가 어떤 명령을 내려줄 것인지 기다린다.
바시키르2937편에 조종석에도 똑같은 경고가 나온다.
Traffic. Traffic.
그리고리예프 교관: 저기 빌어먹을 장애물이 있네요.
닐슨 관제사는 에어로로이드1135편을 관제하기 위해 접근 관제 시스템으로 자리를 옮겼다.
닐슨: 에어로로이드1135편.
1135: 말씀하십시오.
닐슨: 예, 프리드리히스하펜과 전화 연결이 안 됩니다. 그쪽으로 연결해서 ILS 24로 20마일 내 진입 중이라고 알려주세요.
1135: 네. 알겠습니다.
닐슨: 감사합니다.
닐슨: 그리고 5500피트까지 하강하십시오.
1135: 5500피트로 하강합니다.
닐슨: 고도계 수정치는 1008입니다.
1135: 고도계 수정치 1008. 하강 고도 5500피트.
문제 발견
닐슨 관제사는 접근 관제를 마치고 지역 관제 시스템으로 돌아온다. 두 비행기가 충돌 경로에 있다. 메인 시스템이 작동 중이라면 2분 전에 충돌 경고등이 켜져야 했다.
닐슨: 브라보탱고찰리2937, 고도 35000피트로 하강하세요. 항로에 다른 항공기가 있습니다.
닐슨은 바시키르2937편에게 하강을 지시한다. 비행계획상 하강하게 되어있으니 하강 지시가 더 합리적이다. DHL611편은 고도 36000피트에서 그대로 비행하고, 바시키르2937편이 고도 35000피트에서 비행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관제사의 지시 직후 TCAS가 두 항공기에게 각각 해결권고를 내린다.
바시키르2937편에는 상승 지시가(CLIMB), DHL611편에는 하강 지시(Descend)가 뜬다.
바시키르2937편의 조종사들은 혼란스럽다. TCAS의 지시대로 상승할 것인가, 관제사의 지시대로 하강할 것인가.
TCAS 설치는 미국에서 1993년, 유럽에서는 2000년부터 의무화되었다. 러시아 내에서는 TCAS설치가 의무 조항이 아니다. 소련 붕괴로 혼란스러웠던 지난 10년, 러시아 항공기의 해외 비행은 줄어들었다. 조종석에 앉은 기장과 교관이 TCAS가 사용되는 영공으로 비행한 횟수는 16회뿐이다. 바시키르2937에는 TCAS가 설치되어 있지만, 러시아내의 다른 항공기에는 TCAS가 없으니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최신 설비의 지시에 따를 것인가, 익숙한 관제사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DHL611에도 TCAS의 경고가 나온다.
TCAS: DESCENT! DESCENT!
필립스 기장은 즉각 하강한다. 경고음을 들은 캄피오니 부기장이 조종석으로 뛰어온다. 2시 방향에 항공기가 보인다.
캄피오니 부기장: 항공기가 저기 있습니다.
두 항공기가 서로를 보고 있다. 뻔히 보이는 걸 피해갈 수 없을까. 인간의 시각은 비교할 기준점이 있어야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 깜박이는 충돌 방지등만으로는 얼마나 멀리 있는지, 위인지 아래인지 알 수 없다.
TCAS: 하강속도 증가.
필립스 기장은 TCAS의 지시에 따라 급강하한다.
닐슨 관제사의 레이더에는 변화가 없다. 바시키르 2937편은 36000피트에서 빠르게 하강해 35600피트에 있다. 닐슨의 관제 레이더에는 여전히 36000피트로 나온다. 관제 레이더의 갱신 주기는 12초에 한 번. 고도가 12초에 한 번씩 바뀐다. 닐슨은 이미 하강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한 화면을 12초간 지켜볼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DHL611편은 36000피트에서 수평비행을 하고 있으니 바시키르 2937편을 35000피트로 하강시키면 된다. 닐슨은 다시 한번 지시한다.
닐슨: 브라보탱고찰리2937, 고도 35000피트로 하강. 즉각 하강하십시오!
교관 그리고리예프: 35000피트로 긴급 강하.
점프석에 있는 부기장은 TCAS 경고를 복창한다.
부기장: 상승. 상승하랍니다!
교관 생각은 다르다.
교관 그리고리예프: 관제사가 하강하라고 지시했잖아!
그로스 기장은 관제사의 지시에 따라 급강하한다.
지시를 마쳤다. 급한 불은 끈 것일까.
1135: AEF1135. 취리히 호출합니다.
접근 중인 항공기가 닐슨을 찾는다. 닐슨은 시선을 접근 관제 시스템 쪽으로 돌린다. 몇 초만 더 지켜봤으면 DHL611편이 하강하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한숨 돌린 닐슨은 상황을 알린다.
닐슨: 2시 방향, 고도 36000 피트에 항공기가 있습니다.
2시 방향? 닐슨이 잘못 말했다. 항공기는 2시가 아니라 10시 방향에서 다가온다. 바시키르 2937편은 당황한다.
항법사 카를로프: 우리 아래로 옵니다!
그리고리예프 교관: 어디야?
부기장 이쿨로프: 왼쪽입니다!
TCAS: INCREASE CLIMB!
부기장 이쿨로프: 상승하라고 합니다!
부기장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다. 기장은 분당 하강속도를 1800피트로 높인다.
닐슨은 문제를 해결했다 생각하며 접근 통제 스테이션으로 자리를 옮긴다.
필립스 기장은 관제 내용이 이상하다. 상대 항공기가 설마 하강하는 건가? 어두운 밤이라 판단하기 어렵다. 멀리 보였던 항공기가 순식간에 다가온다.
DHL611 (필립스 기장): 600…아... TCAS 지시대로 하강 중!
캄피오니 부기장: 하강하세요.
캄피오니 부기장: 썅. 당장 하강해!
필립스 기장은 최대한으로 하강한다.
바시키르2937편도 보잉757이 돌진하는 것이 보인다.
그로스 기장: 망할!
부기장 이쿨로프 (?): 왼쪽이라고 했잖아요!
757 수직 미익이 칼날이 되어 Tu-154의 배를 가른다. 기체는 두 동강 나 승객들을 흩뿌리며 떨어진다. 닐슨은 에어로로이드1135에게 접근 지시를 한다.
닐슨: 240도로 좌선회, ILS 24 진입, 고도 4000피트로 하강하세요.
1135: 240로 좌선회. ILS 24 허가받았습니다.
1135: 프리드리히스하펜으로 갈 수 있습니까?
닐슨: 맞습니다. 바이바이.
1135: 바이바이.
닐슨은 접근 관제를 마치고 지역 관제 시스템으로 돌아온다. 보여야 할 항공기가 사라졌다.
닐슨: BTC2937편?
닐슨: BTC2937편?
40명의 승객이 기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수직 미익이 떨어져 나간 757은 빙글빙글 회전한다. 두 엔진이 떨어져 나가고 속절없이 추락한다. 757의 블랙박스는 정지했지만, Tu-154의 CVR은 추락하는 2분을 모두 녹음했다. 하늘에 두 기체의 잔해가 불타며 흩뿌려진다. 두 비행기에 탑승한 71명 모두 사망했다.
서방 언론은 러시아 조종사가 관제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관제사가 잘못된 관제를 했다며 반박했다. 아이들을 잃은 우파 시민들은 분노한다. 분노는 잘못된 지시를 내린 관제사에게 집중된다.
스위스 항공 교통관제 시스템은 2001년 민영화되어 민간 업체 스카이가이드가 담당하고 있었다. 경영 효율화를 위해 야간 근무 관제사는 3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3명이 근무할 때는 한 명이 쉬러 가는 게 자연스러운 관행이었다. 인근 카를스루 관제사들은 이 장면을 목격했다. 충돌 직전 닐슨에게 계속 연락하려 했지만 시스템 정비로 인해 연락이 닿지 않았다.
독일 항공사고 조사국은 사고조사 후 닐슨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757이 2시 방향에 있다고 알린 것은 잘못이지만, 이미 시야에 들어온 상황이라 사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고 책임은 취리히 관제 센터의 시스템 결함이다. TCAS시스템이 도입된 직후라 시행착오가 있었다. 우연히 발생한 악재들이 한 번에 겹쳐 사고로 수렴했고, 그 마지막에 닐슨이 있었다. 조사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러시아 건축가 비탈리 칼로예프는 바르셀로나에서 아내에 두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고 다음날 위버링겐에 도착해 유해 수색에 참여했다. 네 살 딸 다이애나를 숲 속에서 찾아냈다.
칼로예프는 유족 모임에서 활동하며 스카이가이드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소송 중인 스카이가이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보상금으로 합의를 하려 했다. 다시 한번 문화가 충돌한다. 서방에서는 돈으로도 사과할 수 있지만, 북코카서스 문화에서는 돈으로 때우려는 건 모욕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칼로예프는 사립 탐정을 고용해 페터 닐슨의 집을 알아낸 후 직접 찾아갔다. 법정에서는 닐슨이 사과하지 않고 피해자의 사진을 함부로 대해 우발적으로 살인했다고 증언했으나, 변호사의 변호 전략일 뿐 그런 사실은 없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었다. 닐슨의 아내와 아이가 보는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닐슨을 칼로 찔러 죽였다.
칼로예프는 8년형을 받았으나, 2년만 복역한 후 2007년 석방되었다. 이후 재혼해 새로운 가족을 꾸렸고, 능력으로도 인정받아 북오세티아 공화국 건설부 차관까지 역임했다. 닐슨의 유족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닐슨 관제사는 사고의 책임을 모두 지고 죽을 만큼 큰 잘못을 했을까. 닐슨의 죽음으로 정의가 이루어졌을까.
TCAS의 중요성은 이 사고 이후 널리 알려졌다. TCAS의 지시는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이 표준화되었다. 한 항공기가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반응이 느리면, TCAS는 상황을 재평가해서 새로 명령을 내린다. 이 사고 이후 두 번 다시 같은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