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가기 전에
호스피스병동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일을 그만둔 바로 그날부터 아빠가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호스피스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자리 나기가 굉장히 어렵고 너무 심하게 몸이 안 좋아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몸이 괜찮으면 들어갔다가 퇴원한 후 나중에 안 좋을 때 다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그때만 해도 들어갔다가 분명히 아빠가 다시 나오실 거다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위급할 때 도움을 받으려고 간 것이지 그곳이 마지막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첫날 갔을 때 주위 분들은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는 유튜브를 보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전쟁이 났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본인 앞을 향해 걸어오는 죽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믿었던 것 같다. 아빠가 나올 거라고.
“선견지명을 갖고 살아라.” 늘 충동적이고 계획적이지 못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였을까. 아빠가 내게 주신 마지막 지혜였다. 다리가 붓고 상태가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날마다 30분 면회를 갔다. 아빠는 “나에게 얽매이지 마.”라고 얘기하셨다.
며칠 전에 빨간 머리 앤을 보았다. 대학생 앤이 집을 나가 독립하려 하자 양아버지 매슈는 이별을 현실적으로만 받아들이려 앤에게 선을 그었다. 매슈가 “앤이 훨훨 날아서 그 애의 인생을 살길 바래.”라고 남들에겐 마음을 표현하지만 정작 앤은 그 말을 듣지 못해서 서운한 오해만 안고 있었다.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그 마음을 우리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로 슬픈 얘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폐가 멈춰서 호흡기를 코로 달았을 땐 울면 숨을 쉬시기 어려워서 함께 부둥켜안고 울 수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감사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그 순간에도 아빠는 내게 “이게 제일 큰 고비야. 아빠가 여기 잘 넘길게”라고 얘기해 주셨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도 내 자녀에게 그런 희망과 사랑을 건네줄 수 있을까.
말씀을 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셨다. 펜과 종이를 드리니 엄마와 서로 사랑한다고 이야기 나누셨다고 한다. 내일이면 오빠가 미국에서 온다고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부은 발이 가라앉았고 아빠 약을 바꿔서 영양제를 넣어드려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 아빠와 헤어졌다. 전화를 받고 가보니 아빠는 얼굴에 끈이 묶인 이상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너무 낯설어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 그 이외에는 전해드릴 것이 없었다.
호스피스 가기 전에 꼭 그 말을 해드렸어야 했다…
너무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