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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희 Mar 03. 2022

우체국 앞에서

주소 없는 소포 어디로 보내나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우체국에 올 때면 유치환 님의 '행복'이란 시가      

입가에 맴돈다.     

유치환 시인이 이영도 시조시인을      

연모하여 지은 시다.     

이영도 시인에게 생전에 5천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니,     

그야말로 우체국 문턱이 다 닳았겠다.      

     

오래전, 아마 스무 살 무렵이었을까?  

    

 2백여 통의 연서를 추려 낸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에 홀딱 빠져버렸다.  

   

나도 그런 절절한 사랑 한 번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책은 내 손에 닳고 닳아서      

없어졌던 것 같다.      

     

나이 들면서 사랑 취향도      

현실적으로 바뀌었지만,

환상에 빠져 살던 그땐

유치환 선생의 사랑편지가

온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5일간의 긴 설 연휴를 보내고 난 첫날이라     

우체국 창구는 한바탕 북새통을      

이루었나 보다.     

택배 박스를 얼마나 많이 포장했는지     

다 쓴 테이프만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딱풀 마저 빈 통들이다.     

직원에게 요구해서 테이프 하나를 얻었다.     

     

오늘은 이벤트에 참여한 독자에게       

책을 보내기 위해 우체국에 온 것이다.      

     

나는 용무를 마치고도      

바로 떠나지 않고 한참을 서성댔다.     

오랜만에 우체국에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저 사람들은 누구에게      

무엇을  보내는 걸까?'     

작은 박스 ,     

큰 박스.     

저마다 각기 다른 사연과     

내용물을 담아     

 주소를 정성스럽게 눌러 새긴다.     

          

5년 전의 내 모습도 그랬다.     

엄마에게 보낼 소포 박스를     

들고 우체국에 자주 들락거렸었다.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는 필요한 걸      

요구하셨다.     

          

     

직접 가지고 내려가면 젤 좋아하셨지만     

못 갈 경우엔 택배로 보냈다.     

요양병원 5년 차 무렵,      

월급제로 일을 하느라 매인 몸이 되어      

자주 못 내려갔다.      

뭐가 필요하신지 매일 물어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아서     

부쳐드렸다.     

          

     



어느 날 내려갔더니      

간호사실에서 택배 좀 그만 보내라고 한다.     

자신들 업무도 바쁜데     

택배 상자 뜯어서 가져다      

주는 것도 귀찮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다 같은 방에 있는 환자들이     

불편해한다는 것이다.      

같이 나누어 드시라고 넉넉히 챙기기도     

하지만 모두를 충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에선 사소한 것 가지고도     

마음이 상했던 것 같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봐야 했던     

엄마의 요양병원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짠하고 설레었던 엄마의 소포.     

     

이제는 보내고 싶어도      

써 붙일 주소가 없는 빈 종이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만 멍하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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