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불편해지기로 했다
여행은 불편한 일이다. 시린 겨울날,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KTX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여행은 이미 고역의 서막이다. 아침잠 많고 게으른 내가 이런 번거로운 행위를 자발적으로 사랑할 리 만무하다.
이번 일정은 네 명이 함께하는 2박 3일간의 힐링 캠프다. 충남 금산에 있는 힐링 센터에 여러 번 가본 쑥 작가의 강력한 권유로 즉흥적으로 짜였다. 사실 나는 얼떨결에 덤으로 끼여간다. 평소 존경하는 덕 작가님이 내 경비 전액을 쾌척해 주신 덕분이다. 감사하면서도 무거움을 안고 따라나선다.
번거롭고 귀찮은 여행길이다. 그런데다 떠밀리듯 염치없는 발걸음 끝에 과연 '힐링'이라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긴 한 걸까.
편안함을 벗어난다는 것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여행의 기술》에서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일상의 익숙함은 안락함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무디게 만든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걸으며 만나는 고정된 관계 속에서 감각은 마모되고 감정은 밋밋해진다. 삶이 자동화되는 것이다.
알랭 레지스는 이를 '편안함의 습격'이라 표현했다. 인간은 안온할 때가 아니라 불편할 때 비로소 본연의 얼굴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편안함은 영혼을 잠재우지만, 불편함은 감각을 깨운다. 어쩌면 여행이 주는 첫 번째 선물은 바로 이 '각성' 그 자체가 아닐까.
여행은 불편하다, 그래서 진실한지도
여행은 그저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 혼자만의 안락을 포기하고 타인과 먹고 자는 시간을 온전히 공유하는 색다른 사회적 행위이다. 내 마음대로 식사 메뉴를 정할 수도, 내키는 대로 퍼질러 잘 수도 없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누리기 어렵다.
특히 누군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떠나는 길이라면 그에 따른 심리적 무게는 배가 된다. 초대받았다기보다 '끼워진' 것 같은 기분,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도 든다. 덕 작가님께 이 마음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고민하다 보니 복잡한 감정들이 여행 가방보다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가는 이유
그렇지만 바로 그 불편함의 틈새 속에서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일상의 가면을 벗고, 사회적 역할의 갑옷 속에 숨겨두었던 취약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동시에 새로운 풍경에 아이처럼 감탄하고, 따뜻한 밥 한 끼에 눈물겹게 감사하는 나도 만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내보일 때, 비로소 진정한 연결이라는 축복이 시작된다. 그 연결이 주는 위안이 있다면, 여행의 모든 불편함은 충분히 보상받을 터다.
나는 몇 번이고 일이 생겨 못 간다고 거절 의사를 밝혀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실 핑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몸이 좋지 않다거나 급한 마감이 생겼다는 식의 방어막은 언제든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왜일까.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하는 이 복잡한 마음을 안고서도 여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 불편함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새벽을 연습하는 시간
출발을 나흘 앞두고 새벽 기상 훈련에 돌입하기로 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오전 7시 KTX를 놓칠까 봐, 지금부터 미리 몸을 길들이려는 것이다. 8시 혹은 9시에 일어나기 일쑤라 비상이 걸렸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들쑥날쑥 게으른 리듬을 강제로 비틀어야 한다. 고작 며칠의 여행을 위해 요란을 떠는 꼴이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준비라는 것의 본질이다. 우리는 불편함조차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불편함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여행을 망칠 수 있지만, 준비된 불편함은 우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새벽 4시, 세상이 가장 고요한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나는 따뜻한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법을 배운다.
" 딴 건 챙길 거 없고 열차 시간 늦지 않게만 나와요." 덕 작가님의 당부가 귓가에 맴돈다. 적어도 출발 당일 아침, 비몽사몽 사이에서 KTX를 놓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힐링의 역습, 다시 살아있음을 느끼기
진정한 치유는 안락함 속에서 오지 않는다. 상처는 건드려야 아물고, 응어리는 꺼내어 보여야 풀린다. 힐링은 회피가 아니라 직면의 영역이다.
여행은 우리를 직면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다.
충남 금산의 어느 힐링 센터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대단한 비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네 명이 함께 나누는 시간 속에서, 조금 더 솔직한 나를, 조금 더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를 만나고 싶다.
덕작가님이 내어준 경비는 단순한 돈이 아니다. 그건 나에게 불편함을 선택할 용기를 건네준 응원이다. 편안함의 나태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선물이다.
선물에 대한 최고의 답례는 여행에 몰입하는 것 아닐까.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어색함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곳에 존재하는 일이다.
여행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 진짜 삶이 있고, 진짜 관계가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2박 3일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까. 힐링이라는 선물을 안고 올 수 있을까.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여행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궁금하다. 그 궁금함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여행이리라.
이제 잠들 시간이다. 새벽 4시, 낯선 모험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