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문장으로 잇는 시간
글을 쓰다 문득 마주하게 된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품고 살았구나.'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해 머릿속에서만 부유하던 마음들을 문장으로 다듬어본다. 그럴 때마다 실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만나는 일이라는 걸.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장면을 지나왔다. 행복했던 날도 아프고 괴로웠던 날도 있었다. 사기를 당해 밤잠을 설치던 날에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한 실패의 경험들은 빨리 잊어버리고 싶고 의미 없는 시간이라 치부해 버리곤 했다.
하지만 펜을 들고 그 시간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문장으로 적어 내려가다 보면 깨닫게 된다. 좋았던 일뿐 아니라 뼈아픈 실패와 눈물조차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소중한 재료였다는 사실을. 무심코 지나친 일상의 작은 조각들 역시 저마다의 온도로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
글쓰기는 그렇게 우리 삶의 퍼즐 조각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그 조각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지금의 나를 이루었는지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를 만나는 행위다. 나를 만난다는 것은 곧 나를 배우는 일이다. 나를 배운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대단한 깨달음을 얻는 데 있지 않다. 그저, 내가 지나온 삶의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작은 실수도, 사소한 선택도, 우연처럼 보였던 만남도 모두 지금의 나를 이루는 단단한 뼈대가 되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는 실패의 기억이 있다면 글로 옮겨 보자. "왜 하필 나였을까?"라는 원망의 질문은 문장을 거치며 서서히 방향을 바꾼다. " 그 경험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 터널을 어떻게 견뎌냈는가"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 경험 덕분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었고,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최악의 경험은 시간이 흘러 글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하나의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자리를 잡는다.
더 나아가 그 경험은 더 이상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누군가에게 조심스러운 위로가 되고 살아갈 용기가 된다.
"나도 그랬어"
"괜찮아"
"넌 혼자가 아니야"
이런 메시지가 된다. 이 지점에서 글쓰기는 개인적 기록을 넘어 세상을 껴안고 타인을 돕는 행위로 확장된다.
감정을 글로 써내는 일은 더욱 특별하다. 분노, 슬픔, 두려움 같은 감정들은 마음속에만 담아두면 점점 뭉개지고 흐릿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때 정말 화가 났었다"라고 한 줄만 적어도, 그 감정은 비로소 윤곽을 갖춘 존재가 된다. 글은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고 형태를 부여한다. 그렇게 이름 붙여진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지 못한다. 이제는 내가 그 감정을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시간을 건너는 대화이기도 하다. 1년 전 혹은 10년 전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글이다. 과거의 나를 보며 "참 애썼다"라고 다독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때의 순수했던 나에게서 지금 필요한 용기를 빌려오기도 한다. 원고지 위에서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 자신과 대화의 공간을 마련하고 우정을 쌓아간다.
그런즉, 모든 사람의 이야기에는 이미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직 글로 써보지 않았을 뿐, 당신의 삶에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스토리가 가득하다. 당신이 견뎌온 시간들, 선택했던 순간들, 사랑했던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이미 하나의 완성된 서사다.
글을 쓴다는 것은 화려한 수사학을 뽐내는 일이 아니다. 잘 살아낸 하루를 귀하게 여기고 아팠던 순간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존중하는 일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이렇게 강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나도 이렇게 연약할 수 있구나' 하며 스스로를 보듬게 된다. 이러한 발견이 바로 글쓰기가 주는 선물이다.
혹시 오늘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면, 아직 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조용히 노트를 열고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어보자. 잘 쓰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솔직하게 쓰면 된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도 표현이 서툴러도 괜찮다. 중요한 건 화려함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다.
글을 쓰는 순간, 당신은 이미 가장 진실한 자신을 만나고 있다. 그 만남은 당신을 이전보다 더 깊고 더 넓고 더 단단한 사람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바로 첫 문장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그 문장 안에서 만날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