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꿈정별 집필 노트” - <자유글 40 꼭지 프로젝트 10번째>
10. 기다린 나 버려진 너
친엄마가 네 달 된 아기를 학대해 죽게 했다는 뉴스를 봤다. 태어나서 넉 달도 채 살지 않은 아기가 얼마나 맞았으면 배에 피가 가득 고인 채 병원에 실려가야 했을까. 그 고통을 어찌 참아냈을까. 나는 눈을 의심했다. AI 허위 뉴스라도 되는 줄 알았다. 눈을 떼지 못하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정인이라는 네 살 아이가 매를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그때 나는 뉴스를 보면서 울었다. 관련 영상을 몇 번이나 다시 보았다. 보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작고, 너무 연약한 아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듣기도 한다.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맞는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분명 쉽지 않다. 그런데 나는 다른 생각이 먼저 든다. 어떻게 그 작은 생명을 그렇게 대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의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불임 병원에 가면 늘 사람이 많았다. 멀리 지방에서 올라와 입원한 사람도 있었고, 근처 숙소를 잡아 놓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역삼동의 불임 전문 병원을 다녔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 알았다. 세상에는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나는 원발성 불임이었다. 한 번도 임신이 된 적이 없는 경우다. 한 번이라도 임신이 되었던 사람은 속발성 불임이라고 의사가 말해주었다. 체외 수정이 진행되면 수정된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기 위해 주사기로 이식한다. 그리고 며칠 뒤 피검사로 착상 여부가 판가름 난다.
갈 때마다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대기실에서 오래 기다려 주치의를 만나 경과를 듣고 오면 진이 빠졌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체중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신체적인 고통보다 더 힘든 건 남편의 표정이었다. 날짜가 정해지면 남편이 한 번은 꼭 병원에 가서 정액을 추출해야 하는데, 바빠 죽겠다며 투덜댔다. 나를 더 미안하게 하고 불안하게 했다. 심리적 안정감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는데 남편은 병원 한 번 다녀가면 자기 역할은 다했다고 자부했다.
담당 여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상해요. 임신이 안 될 만한 특별한 원인이 보이지 않는데. 난임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어요. 신체적인 부분이 70% 라면 정신적인 요인, 환경적인 요인 등 밝혀지지 않은 원인도 작용하거든요." 그러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고 안쓰러워했다. 그 말이 위로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진료실을 오가는 사람들의 상황은 달라도 염원은 하나였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중에도 남편이 따라와 어깨를 감싸 쥐고 다정하게 대화하는 커플이 가장 부러웠다. 나는 늘 혼자였다.
하필이면 그 병원에서 고향 친구를 만났다. 여고 동창이었다. 이미 아들이 하나 있는데 둘째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생기지 않아 불임 치료를 다닌다고 했다.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만으로 묘하게 반가웠다. 나는 인공수정을 1년 가까이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예닐곱 번도 더 했던 것 같다. 배란 촉진제를 투여하느라 동네 약사에게 부탁해 주사를 맞기도 했다. 그 친구는 인공수정에서 임신에 성공했고 쌍둥이를 가졌다. 만삭이 됐을 때도 병원에서 마주쳤는데 배가 터질까 봐 무섭다며 의사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내 기분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 자리에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결국 시험관 아기 시술로 넘어갔다. 한 번에 삼백만 원 정도, 당시로선 아주 큰돈이었다. 시술을 할 때마다 이번엔 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제발, 이번엔. 그 한마디를 속으로 되뇌면서.
나는 그 쓴맛을 세 번이나 맛봤다. 한 번은 수치가 약하게 나와 혹시 착상이 된 건 아닐까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시술한 날은 입원해서 움직이면 안 됐다. 같은 처지의 여자들이 한 방에 모여 벽에 발을 높이 쳐들기도 하고 갖은 비법을 주고받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온 사람, 부산에서 온 사람, 해남에서 온 사람. 옆방에서 건너와 밤새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중 한 여자가 기억에 남는다. 농사를 짓고 사는데 남편이 이장이라고 했다. "이놈의 시끼가 화투를 치는지 여자를 만나는지 집에를 잘 안 들어와. 한 번은 내가 팔 걷어붙이고 쫓아가서 화투판을 엎어버렸당게. 이번에 꼭 성공시켜 그 인간 코를 납작하게 해줄라 안하요." 그 여자가 결국 어찌 됐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그 씩씩한 목소리만큼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세 번째 결과를 받아 들고 병원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기운이 빠져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와 소꼬리를 고아놓고 기다리실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어떻게 마주하나 싶었다. 울지도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아이를 가지려고 했을까. 돌이켜보면 간절한 사랑 때문이라기보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압박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신혼 6개월도 지나기 전부터 은근히 닦달을 해댔다. 친구 모임에 가면 아이를 안고 있는 친구들 앞에서 괜히 작아졌다. 부모님도 기다리다 지쳐 한숨을 쉬었고, 엄마는 온갖 좋다는 한약재를 다 지어 먹이려 했다. 결혼을 했으니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의무감. 부부 사이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나는 그 의무감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아이를 가지려고 애썼다.
12년의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은 나를 귀하게 대하지 않았다. .......
결국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갔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 시절의 간절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기다림의 이름으로 붙들고 있었던 것이 정말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두려움과 의무감이었는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책에서 더 이어가 보려 한다.. (이하 생략)
이 글은 제 책 초고의 일부입니다.
여기까지가 지금 공개할 수 있는 부분이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책에서 더 자세히 만나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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