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입학했던 1970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74학번) 형님, 누나들은 고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 진학 때부터 시험을 봤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76학번) 형님 누나들은 중학교는 뺑뺑이였지만 고등학교는 시험 전형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실력이 좋으셨던 물상 선생님은 첫 수업 시간에 하셨던 말씀이 "과거처럼 시험을 쳐서 고등학교 진학을 한다면 여기에 부산고나 경남고 등 일류를 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정도, 많으면 둘 정도"라고 하셨고 "그다음 수준의 몇 학교는 대여섯 정도, 나머지는 죄다 삼류 학교로 간다"라고 하시며 겁을 주셨다. 그 선생님은 명문 부산고 출신이셨고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 그 후 대학교수가 되셨다.
1980년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과외금지와 함께 대학입시 본고사가 폐지되며 학력고사만으로 입시를 치르는 교육개혁이 이루어졌다. 과거에도 77학번 때부터 고등학교 진학시 평준화로 입시제도가 바뀐 적이 있었다. 이러한 교육개혁은 대부분이 정권교체 때 혹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77학번 평준화는 박통 시절 박지만이 고등학교 진학 때에 맞춰 그리 되었다고 하고 우리 때 본고사 폐지 및 과외금지도 당시 사교육비 부담이 갈수록 커짐에 따라 이를 줄여줌으로써 부도덕하게 권력을 쥐었던 5공정부가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높이기 위해 추진했다고 하는데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80년 초가 월급쟁이들 살기엔 제일 나았던 시절이란 말을 하기도 한다.
과외나 학원이 성행하던 시절 학원가나 과외 시장은 한마디로 돈을 긁던 때였다. 당시 교사들 급여가 고작 월 10만원 정도였을 때 이름이 있던 교사들 특히 영어와 수학 과목의 경우는 과외를 통해 월 200만원 정도까지 벌기도 하였다. 당시 과외하던 영수 선생의 경우 과외 학생을 동료 교사를 통해 모집하였던 것 같은데 담임이 그 반의 학생을 소개해 줄 경우 첫회 과외비는 소개비로 주머니에 넣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본고사 시절엔 있는 집 자녀들은 학교 공부는 제쳐두고 과외를 통해 본고사에서 비중이 컸던 영어, 수학 공부에 치중하였다.
그후 과외가 폐지되고 학력고사로 입시제도가 바뀌다 보니 여기저기서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학원강사와 과외 교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반면 그 시절엔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도 하였다. 과외 없이 학교 공부만으로도 명문대를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외금지 이후 진풍경이 몇가지 있다. 금지된 과외를 대학생이 몰래 하는 '몰래바이트'란 게 나왔고 학원가에서 종합반 선생들은 그래도 생계를 이어 갔지만 단과반 선생들은 졸지에 도시 빈민이 되어버렸다. 일부 단과반 선생들은 당구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한참 후 학원 수강이 허용되었다.
지금도 80년 초 당시의 부도덕했던 정부나 정치인들은 싫지만 과열 과외 및 학원 등 사교육을 금지했던 교육개혁은 다시 한번 이루어졌으면 싶다. 과외가 성행하던 시절엔 심하게 말하면 청소부까지도 과외를 시켜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교육이 공교육 위에 군림하며 일반 시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 돈이 몰리는 학원을 운영하는 사업자들이 연합하여 정치권에 로비를 하며 사교육 중심의 교육체제가 지속되도록 분위기를 조장한다. 둘째, 부유층에서도 돈의 위력을 바탕으로 자기들의 보호 장벽을 높이려 하고 또한 자기네들 잔치에 '개천의 용'이 합류하는 걸 별로 환영하지 않는다.
자수성가했던 어느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어 가난의 세습을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말만 했지 실제적으로 한 건 없었다. 자신도 올챙이 시절을 지나 개구리가 되어 있으니 올챙이적 일들은 별로 신경 쓰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세상에서 개천의 용이 나올 수 없다면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고 살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집에 돈이 많지 않더라도 각 분야에서 성공하는 이들이 많길 손 모아 빌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