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길 가다가도 뭔가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가지고 싶어 한다. 파는 물건은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까지 괜찮아 보이는 건 가지려 한다. 이는 단순한 물건에만 지나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다. 지식, 기술, 심지어 인간까지. 과거 역사를 보면 노예제도에서는 인간을 물건처럼 소유했던 때가 있었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한 나라를 속국으로 소유하기도 하였다. 이 소유의 욕심은 끝이 없다. 소유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생기는 것이고 세상을 떠날 땐 더 이상 소유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때에도 유가족들은 망자가 남긴 소유물을 한 푼이라도 더 가지려 난리를 치며 심지어 싸우기도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식주에 대한 절박감을 가지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때부터 조금씩 소유욕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집, 차, 옷에 보석 등. 그러한 물질적인 소유욕뿐 아니라 정신적인 소유 욕구도 발동한다. 학위에 대한 욕구, 명예욕과 공명심 등. 이러한 소유욕의 끝은 과연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영원히 살지는 못하니 일정 시간 소유의 기쁨을 누리다가는 어느 순간엔 모두 두고 가야 하는데 이때에는 소유한 것이 많을수록 안타까움도 커지리라 짐작이 된다. 고인이 된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1년만 생명을 연장시켜 준다면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절반을 기꺼이 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왜 교회에 가는지 물어보면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그 마음의 평화라는 게 주일날 교회에 가서 앉아 있기만 해도 얻어지는 건지는 모른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현실 속에서 부대끼며 살다가 교회에서 성서 말씀을 대하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긴 한다. 세상에서는 돈도 벌어야 하고 출세도 해야 하지만 성서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고 대신에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보물을 창고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 (마태복음 6:19~24)고 한다. 세상은 소유를 가르치지만 성서는 반대로 무소유를 가르친다. 따라서 교회에 가서 세상에서 돈 잘 벌고 출세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아마도 번지수가 바뀐 곳에 우편물이 배달된 것일 텐데 실제로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꽤 있어 보인다.
과거 어느 성당에서 입시 일주일 전에 입시생 대상으로 특별 미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는데 성당이 입시생 및 그 가족들로 꽉 차서 발 디딜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지나 입시가 끝난 후 입시생 대상으로 감사미사를 열었다는데 그때는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이 하도 없어 텅텅 비었다고 한다. 처음엔 대부분 눈 감고 기도라도 하면 좀 더 나은 결과가 나오겠지 하는 욕심 혹은 기대감이 작용했지만 입시를 치른 후엔 결과가 이미 나와 버려서 인지 인제 눈 감고 빌 일이 없어져 버린 꼴이 되었다.
이렇듯 개인의 신앙까지도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다. 교회나 절에 헌금을 하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반대급부를 복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거 중세 때 면죄부를 발행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 본연의 사랑과 감사 그리고 희생과 봉사의 자리에 영적인 소유욕과 반대급부의 기대심리가 자리 잡고 있는 게 안타깝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인간의 소유욕이란 건 소유를 할수록 만족 대신 새로운 욕심이 계속 생기게 되는가 보다. 한때 제3공화국의 중앙 정보부장 김형욱은 온갖 악역을 도맡아 한 뒤 해임되어 미국으로 망명, 국민들이 세금으로 낸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훔쳐가서는 초호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더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정인숙이란 여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욕심이 지나치니 그리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