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기득권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경우는 수천 년 된 것들부터 다양한 종류의 것들이 있다. 세상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텃세란 것과도 일부 유사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그 뿌리가 훨씬 깊고 공고하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으리라 본다. 그 기득권의 존재는 어찌 보면 이기심과 독단이 낳은 폐습이라 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기득권이 남성이 여성 대비 누리는 권리가 아닐까 한다. 성서의 요한복음 8:1~11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성을 돌로 처죽이려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너희들 중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한다. 그러자 한두 명씩 돌을 길가에 던지며 흩어진다. 어찌 그 간음 현장에는 함께 간음한 남성은 보이지도 않고 힘없는 여성 한 명만 도살장 끌려온 짐승처럼 남겨져 있는 것일까? 당시 유대 법에 의하면 여성은 직업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자는 자신을 부양해 줄 남자를 늘 필요로 했고 만일 남편이 죽거나 할 경우 대신해 줄 남자를 찾지 못한다면 거지 아니면 거리의 여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성서에서 예수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하고 위로해 주던 사람들 중 창녀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 이유도 기득권이 없는 사회적 약자였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늘 예수님이 먼저 다가갔으리라 보인다. 현대에도 똑같이 부정한 행동을 할 경우 남자의 경우에는 여자들보단 관대하게 받아들여지는 시각이 있다. 이런 것도 남성 중심의 사회, 즉 남성의 기득권이 아닐까 싶다.
언제부턴가 '남녀평등' 혹은 '여성해방'이란 말도 나왔다가 최근엔 '나체시위'까지 등장한다. 지금까지 줄곧 자녀가 있는 여성들이 일할 기회는 많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가정에서 무게중심이 남성에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남자에 의지하지 않고는 삼시세끼 해결이 어려우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 후 여성들의 학력 수준 상승 및 각종 제도나 인식의 변화에 따라 전문직과 대학교수를 포함 국회의원 등에까지도 여성의 사회참여의 폭이 넓어졌다. 따라서 남성의 오랜 관행이었던 기득권을 계속 누리기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남성과 여성 말고 생각나는 기득권이 인종적 기득권, 특히 미국에서 백인들이 흑인 비롯 유색인종에 대해 가지는 기득권이 아닐까 한다. 흑인과 백인간 차별이 심할 땐 백인 전용 식당에 흑인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1960년 로마올림픽 복싱에서 금메달을 딴 무하마드 알리는 금메달을 받고도 흑인이란 이유로 백인 전용식당에 갔다가 차별을 받자 애써서 받게 된 금메달을 허드슨강에 버리고 백인들이 지어준 이름 케시어스 클레이를 이슬람식 이름 무하마드 알리로 바꿔 버린다.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각종 스포츠나 연예 분야에 흑인이 주로 활동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정치, 경제, 언론, 의료사업 등의 분야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의 틈을 헤치고 진입하여 성공하기가 워낙 어려웠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과거 이스라엘에서 미천한 신분이었던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고 그 주변에 구름 같은 청중이 모일 때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 등 당시의 기득권층들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누리던 현실적인 권력과 혜택 등이 혜성같이 나타난 예수란 인물로 인해 하루아침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수란 사람이 하던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온갖 트집을 잡고 흠집을 낸다. 예수에게 그들을 지배하던 로마에게 세금을 내어야 하는지 물어보며 함정에 빠뜨리게 하려고도 하고 (마가 12:15~), 안식일인데 왜 병자를 치유하느냐는 식의 낯 간지러운 질문도 한다(요한 5:10~). 결국 '신성모독죄'란 죄명을 덮어씌워 이스라엘식 '능지처참'을 하여 죽여버린다.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 예수와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는 기득권이라는 오랜 관행이 있었다. 그러한 기득권이 존재했던 이유는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편익이 꽤 짭짤하기에 그러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말에 견리사의 (이로운 것을 보면 의로운지를 생각하라)란 말이 있다. 인간이 누리는 자연적인 혜택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도 있지만 일부 인위적인 혜택은 누군가의 불편함, 혹은 아픔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들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러한 고통이 부당한 것이라면 스스로 바꿀 의지를 가져보는 것도 현명한 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