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3가지 대표적인 거짓말들이 있다. 노인들의 "늙으면 죽어야지.", 상인들의 "밑지고 판다." 노처녀의 "시집 가고 싶지 않다." 그 외에 하나를 추가하고 싶은 게 "고독을 즐긴다."이다. 인간은 절대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혼자 있을 땐 누구나 심심해 하거나 외로움을 느끼며 대화할 상대라도 찾게 된다. 한때 대통령을 지냈던 한 사람은 야당 시절 가택연금 시절 집 밖에 나가지 못하다 보니 옆집 이 들여다 보이는 한켠에서 옆집 어린애랑 대화를 나누며 오랜 고독의 시간을 보냈다는 얘기를 대통령이 된 다음 밝히기도 하였다.
고독하면 떠오르는 모습들이 있다. 떨어져 수북 쌓인 낙엽, 황혼이 질 무렵 낙엽 태우는 모습, 헝클어진 머리에 텁수룩한 수염의 나그네, 병실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는 환자 등.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깊은 고독을 만끽해본 기억이 있으리라. 예를 들어 시험에 낙방을 해봤거나, 젊을 때 실연이나 심한 방황을 경험했거나, 이혼 혹은 배우자 포함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경험해 본 경우 등. 두보의 '등고 (높은 곳을 오르며)'라는 시에서는 인생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노래하였다. 그 시를 지었던 때가 자신이 과거에 낙방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라는데 "하늘 높고 바람 거세니 원숭이 울음소리 더욱 애절한데~~ 쇠약하여 병든 이 몸 술잔 드는 일도 그만두었다". 상심 삶의 고독이 온몸을 휘감는 듯하다.
고독은 이렇듯 인간을 오래도록 괴롭혀 왔지만 인간이 고독과 친해질 땐 좋은 선물을 주기도 한다. 위대한 문학과 예술 작품, 철학 그리고 과학과 발명이 그러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와 타고 다니는 비행기 모두 고독의 선물이며 모차르트 음악과 셰익스피어 작품 및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모두 그러하다.
나는 젊은 시절 혼자 처절히 싸워야 하는 고독이 두렵기만 했다. 올초 건강하시던 부친의 건강에 빨간 불이 들어오며 몇 달 버티시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을 때 고독 속에서 나를 늘 지켜주시던 존재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느꼈다.
지금까지의 고독의 체험보다 더 심각한 고독이 앞으로 많이 찾아올 수 있다. 주변의 친지들과 이별하게 되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병실에서 상당 기간 따로 고독하게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세상을 한탄만 하지 말고 친구가 되어줄 무언가를 하나씩 만들어 두면 어떨까? 돈보다 소중하고 명에나 권력보다 더욱 실속 있는 것으로. 나에겐 그런 친구가 하나 생겼다. 나는 그 친구랑 내가 마지막 눈을 감기 전까지 함께하려 한다. 그 친구가 바로 글 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