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통행금지 제도는 1981년 해제될 때까지 36년 4개월간 지속되어 왔다. 일제에 의해 시작되어 식민지, 미군정, 전쟁 이후 분단 상황, 군부독재 등으로 계속되었다. 냉전체제 안에서 국가안보와 치안유지라는 명분 하에 불가피하게 도입된 이후 점차 국가가 제도적으로 개인의 신체와 시간을 통제 관리함으로써 60년대 중반부터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을 통제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나는 태어나서 고2 때까지 자정 이후엔 집 밖을 나서본 적이 없었다. 어디 공부를 하러 갔다가도 자정이 가까워지면 바짝 긴장하곤 하였다. 남자들이 술자리를 가질 경우에도 자정이 다가오면 유치장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총알택시를 타는 등 비상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1년에 딱 두 번은 예외였다. 크리스마스이브와 세모. 그땐 일부러 거리를 서성대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틀 말고는 자정이 지나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은 당시 파출소로 끌려가서 즉결심판을 받고 귀가하게 되었다. 그 시절 상습적인 술꾼들은 저녁에 술을 먹다 시간이 자정 가까이 되면 미리 술집 주변의 여관을 하나 잡아놓고 11시 55분경 아지트를 옮기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엔 통금 (통행금지) 외에도 사회분위기가 무척 살벌했다.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교 진학할 때 무슨 이유인지 마치 군 입대하듯이 갑자기 머리를 짧게 밀어야 했다. 긴 머리가 갑자기 중머리가 되니 머리 앞쪽 부분이 해를 안 받아서 인지 허옇게 보이는 등 가관이 아니었다. 여학생들도 갑자기 머리를 짧게 자르다 보니 뒤쪽 목에 닿는 머리 부분이 밀려서 허옇게 드러나는 등 이 또한 가관이었다.
이런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사회분위기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왜?"라는 질문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고등학교 때에는 교련 과목을 통해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다. 해마다 봄이 되면 교련 검열이라 해서 제식훈련이나 총검술을 감독관에게 보여주는데 정해진 기준에 미흡할 경우 재검이란 걸 받는다며 겁을 주기도 했다. 검열 시 대대장, 연대장 등 학년 간부들은 긴 칼을 차고 구령을 외치며 위용을 부리기도 했다.
우리 자녀들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할 때 또한 독재정권이 아닌 민주화 정부 때 태어나 '통금'이나 '교련'이란 말이 마치 외국어처럼 생소할지 모른다. 또한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그때는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라 대한민국에는 전쟁 위험도 상존하였다. 사회가 어수선할 땐 "남한 내 북한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고정간첩 체포"와 같은 무시무시한 기사가 신문 첫면을 대문짝만 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지금도 통금이란 말을 대하면 왠지 모를 향수를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 어른들 중 "조선 놈들은 풀어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유를 주면 세상이 혼란해진다는 것이다. 경제성장만을 생각한다면 통금과 같은 자유 제한 조치가 최선일지 모른다. '임금협상', '노동자 처우개선' 등과 같은 말을 꺼내면 곧 빨갱이로 취급되어 구속되던 시절도 그다지 먼 옛날 일은 아니었건만 세상이 참 좋아지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