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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야구 영웅 최동원

by 최봉기

현재 프로야구팀이 지역별로 있고 응원 열기는 각 지역의 자존심과 정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부산 시민들의 야구 사랑은 스포츠를 즐기는 정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과거 고교야구 화랑배 쟁탈에서 초창기 프로야구까지 구덕야구장에서 울려 퍼지던 함성은 출정을 앞둔 로마 군대의 함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제 슬슬 부산의 야구 영웅 최동원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최동원은 구덕초, 토성중, 경남고, 연세대, 아마 롯데를 거치며 국가대표의 에이스 투수였고 프로 롯데 자이언츠에 최고 연봉을 받고 입단하였다. 최고 전성기는 실업팀 롯데 때라는 얘기가 있는데 프로 첫해 땐 몸상태가 좋지 못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여 일부 야구팬들로 부터 한물갔다는 얘길 듣기도 했다.


그러다 84년 몸이 만들어지고 괄목할 기량이 나오자 28승을 거두며 롯데란 만년 하위팀이 급기야 코리안 시리즈에까지 진출한다. 그것도 롯데를 늘 가지고 놀던 삼성이 일부러 져주기를 하며 시리즈 상대를 롯데로 택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결국 7전 4 선승 중 최동원이 4승을 거두며 우승을 한다. 나는 2승 2패로 4차전이 끝난 후 5차전을 관람하러 잠실야구장에 갔다. 그때 최동원은 잘 던졌지만 예상치 못하게 홈런 한방을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된다. 당시 나는 이제 드디어 시리즈가 삼성의 페이스로 가는구나 생각하며 친구들과 야구장을 힘없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데 정문 근처 롯데 마크가 그려진 버스 창가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던 최동원이 보였다. 불현듯 롯데 팬 한 명이 "우리 최동원 선수에게 박수 한번 쳐줍시다" 라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창가 주변에 모여 묵묵히 박수를 쳤고 최동원은 앉은 채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그리곤 다시 전열 정비 후 3승 3패가 된 후 마지막 7차전. 경기 초반부터 연일 연투로 지칠 대로 지친 최동원은 예전의 투구를 하지 못했고 결국 홈런까지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되기 직전이었는데 상대 투수 김일융도 슬슬 탈진상태가 되어 예상 못한 극적인 홈런까지 허용해 롯데의 승리로 코리안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지금까지 한국 프로야구 코리언시리즈 중 가장 드라마와도 같았던 최고의 경기였다. 윗과 골리아의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하게 되었다.


후 몇 년간 롯데에서 계속 최고 연봉자로 활약하던 최동원은 구단을 상대로 연봉협상, 선수 처우 복지 관련 개선을 요구하며 선수협을 결성하였다. 그리된 배경은 최고 대우를 받던 그가 2군 선수들과 연습을 하며 고기를 사줬는데 2군 선수들이 미친 듯이 먹더라는 것이다. 이에 최동원이 "너희들 고기 구경도 안 한 사람 같다"라고 했더니 그들 말이 자기네들 연봉으로는 고기 먹을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해태 선수 하나가 자동차사고로 사망을 했는데 구단에서 제공한 보상금이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의 돈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최동원이 선수협 결성하자 롯데 구단은 그를 섬성에 트레이드하였는데 그후 그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채 몇 년 후 은퇴한다.


은퇴 후 최동원은 시의원 선거에 나왔는데 당시 경남고 선배 김영삼 대통령 시절 여당으로 나가면 쉽게 당선될 것을 야당 민주당으로 나가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 후 야인으로 지내다 쉰 초반 대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최동원이 부산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표현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야구를 어느 지역보다 사랑하는 부산의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를 그것도 당시 만년 하위였던 팀을 자신이 몸을 사리지 않고 사력을 다해 우승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경기가 패배로 끝난 후에도 늘 변치 않는 맘으로 격려하고 북돋아주던 부산 시민들의 마음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부산 시민은 타 지역 사람들에게도 텃세 없이 마음을 열어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애써주는 포용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최동원은 자신이 최고의 대우를 받던 스타플레이어였음에도 2군 선수 포함 다른 팀 어려운 처지의 선수들을 늘 생각해주고 그들도 좀 나은 대우를 받도록 노력해줬다는 점이다.


셋째, 부산은 전통적으로 야색이 강했으며 불의에 저항하여 4.19, 부마사태 때 거리로 나와 저항하며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지역이었다. 최동원도 정의감으로 불의에 저항함으로써 스스로 편하게 살 수 있던 꽃길을 차 버리고 가시덤불에 뛰어든 야성의 소유자였다. 부산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아 온갖 정치적인 탄압을 받아왔는데 최동원도 그런 정신에 한치 오차 없이 살아온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미 고인이 된 최동원은 부산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부를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서울과의 격차가 커지며 그 위상도 초라해진 부산이지만 부산이 보여준 포용력과 시대정신을 잘 살린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하고 빛나는 도시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때는 최동원도 저 하늘의 별이 되어 함께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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