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베이비붐 세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인데 태어난 이후로 다양한 정치 경제적 변화를 겪기도 하였다. 나의 자녀들은 내가 지네 나이 때 느꼈던 것들을 얘기하면 마치 딴 나라 얘길 듣는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내가 태어나서 오랜 시절을 보낸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의 기억에 대해 스케치해 본다.
어린 시절 내가 생활했던 부산이란 도시는 규모도 컸지만 도시 자체의 에너지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왕성했다. 부산역을 지나면 부두가가 이어졌는데 거기선 전국에서 이동되어온 물품들이 컨테이너에 실려 해외로 수출되었다.
인구가 한때 5백만 명까지 올라갈 정도였고 대구의 약 2배이다 보니 과거 명문이라고 하던 고등학교가 대구는 하나였던 반면 부산은 둘씩 되었다. 또한 부산은 주변의 경남뿐 아니라 호남, 충청에다 제주에서 이주한 사람들까지 있었으며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까지 합쳐 그야말로 전국구였다. 초량에는 화교학교에다 차이나타운에 미군 상대로 한 술집들 (텍사스)까지 있던 이국적인 곳이었다. 그밖에 일본과의 지리적 밀접성 때문인지 일본단어가 타지역보다 많이 사용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기마이', '와이로', '따까마시', '사바사바' '나와바리' 등 이 그러하였다.
부산은 국내 제2의 도시였지만 전통적으로 대구나 진주에 비해 천한 지역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배타는 '마도로스'들이나 사는 도시였고 문화예술 혹은학문보단 장사나 하며 사는 도시로 인식되었다. 과거 부산엔 고등법원도 없었고 세계적인 관현악단이 오면 대구까지만 왔다가 돌아갔다고도 한다.
이러한 지역특성에도 불구하고 부산은 나름 魅力이 있는 도시였다.
첫째, 부산에 타 지역 사람들이 쉽게 몰릴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기술이 없이도 끼니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늘 부두에는 하역일을 할 수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노가다일이 부산에서는 하역일이었 다.
둘째, 부산은 대구나 진주 등에 비해 향토성은 약하지만 외지인들에 대한 텃세가 비교적 적었고 이들도 먹고 지낼 수 있는 풍토가 되었다. 부산말은 투박하여 거칠어 보이기도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부산사람들은 포용력과 배려심이 있는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셋째, 부산은 개인소득이 타 지역보단 높았던 도시라 생각된다. 선원들이 많다 보니 이들의 수입은 일반 봉급생활자의 최소 몇 배는 되었다. 친구 부친은 갑종 선장이었는데 70년대 후반 교사 급여가 10만원 정도일 때 200만원정도의 월급을 받아 가족들에게 보내주셨다. 그러다 보니 부산 사람들은 소위 기마이도 좋아 고급 음식점에서 돈을 팍팍 쓰기도 하였고 유명 브랜드의 옷이나 신발을 착용하고 남포동이나 광복동을 다니기도 하였다.
부산을 대표했던 인물이 누구인가 하고 물어본다면 여러 정치인들도 있겠지만 운동선수 중 '최동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대한민국에서 아마추어와 프로를 합쳐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고 자신 외 어려운 처지의 선수들 권익을 위해 선수협을 만들다 구단의 비위를 거슬리며 트레이드되고 결국은 세상을 일찍 하직했던 그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야구를 무척 좋아하며 특히 84년도 코리언시리즈에서 롯데가 삼성을 극적으로 꺾고 우승할 때 최동원이 했던 피칭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최동원의 경우도 그랬지만 부산이란 도시가 특히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산의 정의감과 인간미를 드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부산은 대표적인 야당 도시였고 그로 인해 탄압도 많이 받곤 하였다. 혜광고 출신 고 박종철 군도 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되었던 부산 출신 순수한 청년이었다.
현재 초등학교 동기들의 부모님들 고향 중 부산인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우 부친은 함경남도 이원, 모친은 경남 의령이다. 하지만 부산에 정착하여 70여 년을 지내셨고 제2의 고향인 부산에서 가지는 자긍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부산을 굳건히 지키는 동기들 그리고 서울이나 기타 도시에서 생활하는 친구들 공히 우리가 유년, 청년을 보내었던 부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산이 지금보다 더욱 발전하여 아시아 그리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도시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