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다양한 피해자가 존재하지만 피해가 발생할 때에도 가해자가 힘이 셀 경우 슬쩍 빠지거나 언급이 되지 않고 피해자만 발을 동동 굴리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피해자의 힘이 셀 경우 엉뚱한 사람이 졸지에 가해자로 둔갑하기도 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성서의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이다. 요한복음 7:53~ 8:11에는 율법학자와 바리세이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를 잡아와서 예수님께 "율법에는 간음하다 잡힐 경우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라 하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라고 한다. 간음 현장에는 남자도 있었을 텐데 여자만 등장한다. 유대 법에 여자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에 의존해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데 만일 남자가 사망할 경우 의지할 다른 남자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는 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여자는 몸을 팔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런 법을 만든 것도 남자이건만 여자가 간통하다 들키면 돌로 쳐 죽이니 여자는 이중 피해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예가 한일관계이다. 일본은 조선을 침탈하여 주권을 빼앗고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았고 전쟁까지 일으켜 조선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았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언급하지 않고 가해자인 지네들 덕분에 조선이 근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종군위안부의 경우 최근 와서는 이들 중 일부는 직업여성도 있었다고 하며 자기들의 가해 사실을 덮으려는 수작도 부린다. 위안부들 가운데 미국 여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결국 이 경우도 가해국이 피해국보다 강자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반대로 피해자가 영향력이 강한 경우 엉뚱한 사람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영화 '7번 방의 손님들'에서는 경찰청장의 딸이 빙판길을 걸어가다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을 하는데 경찰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땅바닥에 쓰러진 여자애를 살리려고 애를 쓰던 한 힘없는 남자를 살인 혐의자로 조작하여 교도소에 수감시켜 버린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영향력에 따라 어떨 때는 가해자는 쏙 빠지고 피해자만 애처롭게 자신의 억울함을 외치게 되며 어떨 땐 멀쩡한 사람이 가해자까지 되는 것이 현실이라 생각하니 세상에 진정 힘 외에 공정함이란 게 있는지 개탄스럽기만 하다. 법이란 강제조치는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건만 실제로는 힘 있는 자들이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여권이 신장되고 대한민국의 위상이 올라가고 힘없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야 더러운 꼴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는 가정이라면 힘이 없을 땐 계속 어떤 설움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씁쓸함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