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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의 겉옷 벗기

by 최봉기

증류수는 이물질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온도가 섭씨 0도가 되면 정직하게 얼고 100도가 되면 어김없이 끓는데 이물질이 섞인 물은 0도에도 잘 얼지 않고 100도에 잘 끓지 않기도 한다. 인간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갖난 아이 때는 방어능력인 면역기능 결핍으로 해로운 균이 몸에 침투하기라도 하면 생명을 잃기도 한다. 또한 갖난 아이는 세상의 때가 묻은 어른들보다 순수하지만 혼자 힘으로 뭘 할 수 없어 배고프면 울고 허기가 채워지면 눈을 감고 엄마 품에서 잠드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무능력자이다. 하지만 인이 순진무구함만으로 남에게 의존해 살려한다면 '애어른'일 수밖에 없다.


순수함이란 때 묻지 않은 인간 본연의 고귀한 모습이지만 동시에 나약하기 짝이 없는 무능한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고전 '흥부전'에서 동생 흥부와 형 놀부를 보면 흥부는 순박하며 법 없이도 살 사람인 반면 놀부는 자기 이익 외엔 관심을 두지 않는 현실주의자이다. 또한 흥부는 감당할 능력도 없을 정도의 식솔들을 거느리며 끼니도 해결하지 못해 형댁에 구걸하러 갔다가 밥알이 붙은 밥주걱에 뺨을 맞고 얼굴에 묻은 밥알을 뜯어서 먹기나 하는 한심하고 무능한 가장이다. 반면 놀부는 인정 없는 야박한 인간이지만 최소한 남에게 손은 벌리지 않는 실속과 자립성을 갖춘 자라는 현대적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이 세상은 여러 부류의 인간들이 모여 살고 각종 이해관계가 얽혀 시기심에다 한술 더 떠 모함까지 난무하며 심지어는 부모의 재산을 놓고 가족끼리도 원수처럼 싸우는 판이니 본연의 청정 자연수의 수질이 갈수록 악화되는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더럽게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일도 사실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순수함은 결코 약자의 변명이나 무능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직까지 약자보다는 강자가 중심인 세상의 질서 속에서 부당함과 싸우며 좀 더 인간적으로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헌신할 수 있는 순수함이라면 아직 어둡기만 한 밤하늘을 밝게 비출 샛별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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