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선진국이 되기까지
박정희의 리더십에 대한 회고
대한민국이 현재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반열에 와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직도 왠지 믿기지가 않는다. 1970년 초중반이던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는 현재의 눈으로 보면 코웃음이 나오는 수출 100억 불, 개인소득 1,000불 달성에 전 국민의 관심이 모아졌다. 당시에는 듣기 좋게 조어된 '중진국'이란 말을 대한민국 앞에 늘 붙였다. 그 시절에는 대한민국의 과학과 기술 수준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주로 저가 위주인 섬유나 가발 등 노동집약형 산업 중심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정치적으로 보면 1961년에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가 1963년에 대통령이 된 이래 3선 개헌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영구총통제'인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을 함에 따라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며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렸지만 박정희는 자신이 추진해 왔던 경제개발을 계속 밀고 나갔다. 여태껏 나는 박정희란 인물이 평생 권력만을 좇아 독재를 해오다 어느 날 최측근에 의해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던 비통한 통치자였으며 자신의 몰락을 모두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단정해왔다. 또한 한때 그를 비난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고 자격정지까지 당했음에도 시간이 지나자 박정희의 공을 인정했던 고인 김동길교수에 대해서도 좋게 얘길 하진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 이후 국가통치를 맡았던 국가지도자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조금씩 바꾸게 되었으며 다시금 박정희와 같이 역량과 소신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지도자가 진정 나와주길 바라게 되었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됐는지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박정희는 아랫사람들이 따르기 충분한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철학을 가졌다. 군인이었던 시절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들은 책임감과 소신이 강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청렴하고 서민적이었던 그를 인간적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당시 군대에 있던 수뇌부들은 소신도 없고 부패했기에 박정희 자신은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세상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둘째, 박정희는 어둡고 암울했던 시절 "우리도 하면 된다"는 희망을 갖게 했던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비록 민주적이지 못했고 평생 권력을 놓지 않은 독재자였지만 국민을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경부고속도로개발 등 국가의 발전을 위해 지도자로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직접 현장을 다니며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고 업무지시를 했던 '실무형 지도자'였다. 수출 관련 회의를 할 때엔 자신이 직접 통계자료를 보며 실무자에게 질문을 했는데 디테일한 것들을 분석하고 종합했던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셋째, 박정희는 인간적이면서도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했다. 박정희는 청와대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늘 자녀 교육문제와 가정사에 대한 것들을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곤 했던 자상하고도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아랫사람의 어려운 일들은 앞장서서 해결해 주었지만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하였다. 특히 친인척의 이권 개입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현재 대한민국은 눈부신 발전을 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는데 그 속에는 기업들의 뼈를 깎는 노력과 잘살아 봐야겠다는 국민들의 의지 및 교육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잊지 않아야 하는 게 바로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혹자들은 발전의 이유와 관련하여 지도자의 몫을 빼거나 폄하하기도 하며 모든 건 국민들이 한 것이란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독재를 하면서 부정축재했던 돈을 해외로 빼돌리며 국민들 원성을 사기도 하였건만 18년간 통치를 해왔던 박정희는 결코 그렇지 않았고 온몸을 던져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던 지도자였다. 중국의 '등소평'과 싱가포르의 '이관유'까지도 그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인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