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이 있었기에
주인공 박정희의 동거녀 이현란 스토리
무대나 스크린에는 늘 주인공이 있다. 내가 지금껏 반세기동안 영화를 봤지만 주연이 없는 영화는 하나도 없었다. 모든 영화에서는 일부러라도 스타를 만든다고 한다. 어떤 영화는 스타를 행복하게 또한 어떤 영화는 스타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단지 한 명의 스타를 크게 부각하기 위해 초입부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계속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조연이다.
TV드라마 '허준'에서는 명의 허준이란 인물을 부각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연들이 등장한다. 허준의 어린 시절 서당에서부터 산음의 한의원, 한양의 혜민서, 내의원을 거치며 악역들과의 갈등과 모함 속에서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 허준은 결국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되고 '동의보감'의 저자로 길이길이 존경받고 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도 등장인물은 500명씩이나 된다고 하는데 이 또한 나쁜 무리들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하며 몰락한 최참판댁 마지막 핏줄 '서희'란 어린 주인공이 고향 하동에서 쫓겨나 만주로 이주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짜릿한 역전의 성공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드라마가 아닌 실제 삶에서도 한 인물이 큰 일을 하는 데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한 인물 중에서 잠시 스쳐간 조연급 인물은 큰 인물이 역사의 뒤인길로 사라지지 않고 큰 일을 하는 데 있어 운명적인 관계가 되기도 한다. 고인이 된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쪽에서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장기집권을 하다 측근에 의해 숨을 거둔 악랄한 독재주의자이지만, 또 한쪽에서는 전쟁을 겪고 세계 최빈국이던 대한민국을 지금과 같은 선진국으로 만든 유능한 통치자이다.
박정희란 인물은 1917년에 태어나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18년간 통치를 하다 1979년 62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인물로 삶의 과정이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특히 그의 삶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1947년에서 1950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때 잘못하면 여수순천 사건으로 군 내부에서 숙군작업이 일어날 때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당시 그는 10여 년 전 시골 문경의 초등학교 교사시절 별 애정도 없는 상대와 집안 어른들 권유로 떠밀린 결혼을 했고 딸 하나를 둔 유부남이었건만 그 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군인이 되어 지인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가서 상대편 들러리로 나왔던 한 여성에게 반해 곧바로 그녀와 동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현란'이었다. 그녀는 박정희보다 8살 아래였고 원산에서 공산당이 싫어 월남해 이화 여전에 재학 중이었는데 박정희는 그녀를 무척 사랑했지만 그녀는 박정희를 그리 사랑하지 않아 수시로 부부싸움을 하고는 가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녀는 박정희가 남로당 소속이었고 딸까지 있는 유부남이란 사실을 안 다음 영원히 박정희 곁을 떠나게 되었다. 박정희는 숙군작업 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미리 도망가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현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아마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거나 아니면 도망 다니다 잡혀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거라고 한다.
결국 잡혀가 고문을 당하면서 군내부의 남로당 조직에 관한 정보를 낱낱이 알려주며 숙군에 기여한 공을 헤아린 당시 수사책임자이던 만주군관학교 선배 백선엽의 선처로 사형 대신 무기형, 10년형 등으로 감형되었고 결국 한국전 발발 시 사상적으로 완전히 전향했다는 확신을 상부에 심어주며 다시 군에 복귀하게 되었다.
박정희란 주인공의 삶에서 이현란이란 여성은 육영수란 배우자를 만나기 전 잠시 동거했던 별 의미 없는 조연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특히 그녀는 동거남인 박정희를 그다지 사랑하지도 않아 수시로 가출이나 했고 결국은 그를 버린 여자였지만 박정희가 도망가지 않고 수사를 받게 된 것은 바로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삶 속에서 이현란이란 조연과의 인연을 통해 결국 대통령까지 되어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한 주인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