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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의사였다면?

by 최봉기

나는 의사가 아니지만 나의 배우자는 치과의사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藥士이신 부친께서는 의과대학에 가란 말씀을 하셨다. 나는 사실 의대를 갈 정도로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이공계 특히 의학과 관련이 높은 화학, 물리, 생물 등의 과목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의과대학에 가는 걸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 내가 공부를 잘해서 의과대학을 들어가 졸업을 하고 전문의까지 되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본다. 전공분야는 내과나 외과보다는 정신과를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글을 매일 쓰다시피 하는 것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 내지 관심 때문이라 생각된다.


몸에 이상이 생기기 전에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을 제대로 진단해서 미리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정신적인 문제까지도 약으로 해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약을 써서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단계라면 무척 상태가 악화된 경우라 보인다.


나는 건강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평소에 시간이 있을 땐 걸어서 다니거나 운동도 꾸준히 하는 편이고 몸에 좋지 않은 건 잘하지 않는다. 피웠던 담배도 끊은 지가 30년이 되었고 무료하거나 쓸쓸할 때 벗으로 삼던 술을 이제는 멀리 할까 한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혈액검사 결과 간 수치가 약간 좋지 않게 나왔다. 건강이 계속 좋아야 오랫동안 지금보다 더 훌륭한 글을 많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건강을 책임지는 건 의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자기 자신의 주치의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건강한 사람은 사실 병원문을 노크할 일이 없다. 의사를 자주 찾는다는 건 이미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미 망가진 몸은 노력해도 원래대로 회복시키기는 어려우리라 보인다. 기껏해야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정도일 것이다. 인간이 건강한지 아닌지의 여부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세 가지에 별 문제는 없다. 단 무엇이던 가리지 않고 잘 먹는데 이젠 과거에 잘 못 먹던 술까지도 잘 먹어 문제가 된 것이다.


지금은 연로하셔서 약국을 폐업하신 나의 부친이 어린 시절 종종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의사나 약사가 배불리 잘 사는 사회는 썩을 대로 썩은 사회이다"란 말이다. 그때는 사실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의사는 전문직으로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잘 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순이 된 이제는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의 수는 최소화되도록 사회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또한 혹 병원에 갈 일이 생기더라도 의료비 부담은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이 어떤 이유로든 일을 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누워있는 상황이 되면 가정은 극도로 힘들어진다. 만일 그런 상황이 길어질 경우라면 배우자는 술집에 가서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조금만 기온이 떨어지면 어기 저기서 콜록콜록 소리가 진동하고 시시때때로 병원마다 아픈 사람이 줄을 서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병이 든 사회이다. 그러면서 의사란 전문직 종사자는 병원만 개업하면 몇 년 안 되어 집을 사고 조금 일하면 큰 집에, 최고급 차에 별장까지 가지며 산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이상은 내가 어린 시절인 197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의사란 사람이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 TV드라마가 사극 '허준'이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의원은 환자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하며 돈을 벌려면 의원 대신 역관을 하라고 가르친다. 유의태는 대감댁 안주인의 중풍을 치유해 준 답례로 허준이 대감으로부터 받아온 내의원 추천 서찰을 불에 태워버리고 허준을 내쫓아 버린다. 그러한 혹독한 가르침 속에서 허준은 醫術이 아닌 醫心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조선 최고의 의원이 되어 '東醫寶鑑'이란 의서를 남겼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죽어가는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의원을 心醫라고 한다. 이름난 의원인 名醫도 훌륭하지만 心醫는 더욱 훌륭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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