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격투기 종목도 있지만 과거엔 복싱만큼 격렬한 스포츠가 없었다. 복싱하면 따라붙던 말이 '헝그리정신'이었다. 70년대 때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 중에서는 재능을 살려 가수나 배우 등 연예인 혹은 복서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복싱은 얻어맞는 운동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뛰어난 복서일수록 얼굴이 깨끗하다. 유명한 복서이자 해설가였던 홍수환의 말이 얼굴이 깨끗한 선수는 시합 전부터 겁이 난다고 한다. 펀치를 피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굴이 일그러진 선수들은 때리는 족족 그대로 맞는다는 것이다.
과거 15라운드였던 세계타이틀경기가 12라운드로 바뀐 사건이 있다. 1982년 김득구가 미국 원정경기에서 챔피언인 멘시니에 도전했다 KO 패하고 나서부터였다. 14회까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텼는데 결국 쓰러지고 나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세계챔피언이 되어 15차 방어까지 했던 장정구의 말이 고인이 된 김득구는 원래 복싱 스타일이 저돌적인 인파이터가 아닌 약간 약은 복싱을 하는 선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 선수였던 멘시니가 강펀치의 인파이터였다고 한다면 펀치의 강도가 떨어지는 김득구가 같이 맞붙는다는 건 심하게 얘기해서 자살행위라는 것이다.
내가 봤던 기억에 남는 복싱경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상을 깨고 알리가 포먼을 KO 시키던 경기, 적진 일본에 가서 5차 방어전을 하던 챔피언 와지마 고이찌를 쓰러뜨린 유제두의 경기. '링의 대학교수' 란 닉네임의 미구엘 칸토를 불러 챔피언이 되고 강타자 에스파다스와의 방어전 때 다운을 뺏기고도 역전 KO승을 거둔 복싱천재 박찬희의 경기, 저 멀리 파나마로 날아가 '지옥에서 온 악마' 카라스키야에게 4번 다운된 후 다시 일어나 KO승을 거둔 홍수환의 경기 등.
만일 내가 복서였다면 어땠을까? 선수 이전에 호신 수단으로 복싱을 배웠더라면 싶을 때가 있다. 중학교 때 나만 보면 겁을 주면서 담배값을 달라고 하던 한 학년 위 양아치가 하나 있었다. 돈이 없다고 하면 뒤져서 만일 나오면 10원에 한 대씩 패겠다는 것이었다. '친구'란 영화에서 칼로 사람 찌르는 장면을 몇 번씩 봤다던 청소년 하나가 수업 중이던 앞 교실에 칼을 들고 들어가 자신을 괴롭히던 인간의 급소를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끔찍한 일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친구를 이해할 것 같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고 한다. 참 좋은 말이다.
모르긴 해도 남자라면 자신을 무시하거나 혹은 부당하게 대할 때 "맞짱 한번 뜰까?"란 말을 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정도가 되려면 맨주먹으로 한둘은 제압할 정도의 실력은 있어야 한다. 평화란 것도 힘이 있을 때 지켜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