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인도차이나 전쟁인 월남전(1964~75)에 1965년 9월 25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군대의 파병이 이루어진다. 베트남은 1883년부터 식민통치를 하던 프랑스가 물러나고 2차 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 통치하에 있을 때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2차 대전 후 1946년에 다시 프랑스가 베트남을 손에 넣으려 할 때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고 1954년에 베트남이 승리하며 프랑스를 몰아낸다.
그 후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걸 싫어한 미국이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는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며 민족지도자요 사회주의자인 호찌민이 다스리는 북베트남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다 1964년 8월 미군 전함 2척이 베트남과 중국 경계인 통킹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이 베트남전쟁이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며 전쟁까지 일으킨 것에 대한 세계 여론은 좋지 못했다. 미국은 이에 우호적인 나라들을 연합군 형태로 전쟁에 참전시키려 했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서 베트남에 보내려 하자 안보상 위협을 느끼고 미군은 그대로 주둔케 하는 대신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리하여 처음 의무부대를 필두로 수도사단 맹호부대와 해병여단 청룡부대와 9사단 백마부대 약 55,000명이 파병되며(누계 합산 30만 명) 이중 약 5천 명이 숨을 거둔다.
만일 내가 월남전에 파병되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군대생활을 한 부대가 맹호부대였다. 그런 면에서 월남전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파병되는 병사들은 부산항에서 배로 베트남의 다낭까지 이동을 하였다. 베트남은 면적이 우리보다 크고 인구도 우리보다 많은 나라이며 우리와 달리 밀림지역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 전쟁경험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고 훨씬 위험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무기나 전력면에서 떨어지는 베트남을 우습게 봤으며 몇 달 정도면 전쟁이 끝날 걸로 예상을 했다. 하지만 땅굴속으로 이동하고 주부들 시장바구니에서 수류탄이 나오는 게릴라전에는 비행기 융단폭격이나 현대식 무기가 통할 리 없었다. 게다가 베트남은 비록 사회주의지만 남베트남보다는 민족지도자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컸다. 그리보면 사실 미군이 철수할 때 베트남을 탈출한 '보트피플'은 도망가지 않으면 처형될 부패관료이거나 강대국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전력을 떠나 명분으로 봐도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우방 미국이지만 우리가 참전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할 것이다. 단지 우리가 참전을 했던 건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위한 생존차원이었다. 요컨대 우리의 월남전 참전은 경제적인 이유와 군전력 향상 때문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들은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한국 군인이 죽거나 피해를 입은 지역은 상상을 초월하는 학살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일본지배하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극이 장소를 바꿔 그대로 시현된 것이다.
월남전 종전 이후 실종자들과 관련해 밝혀진 내용 중에는 이들이 생존해서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있었다. 어딘가라면 과연 어디일까? 월남전에서 한 소대가 작전을 나가 베트콩들과 전투를 벌인 후 사망자 외에 몇 명은 실종되었는데 베트콩에게 생포된 것이다.
생포될 경우 며칠을 땡볕에 묶여 있다 살기 위한 하나의 옵션으로 북한에 보내진다. 단 베트남전에서 생포된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 조건이며 대신 북한을 동경해 탈출해 왔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북한에서 가정을 꾸리며 사는데 그러한 사실이 탈북자들에 의해 간간이 알려지는 것이다.
베트남이란 나라를 보면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실감 난다. 겉으로 볼 때에는 별 내세울 게 없지만 민족적인 자존감 하나는 따라올 나라가 없어 보인다. 세계에서 미국이란 강대국을 꺾고 쫓아낸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하다. 비록 우리와 체제는 다르지만 외세에 의해 두 동강이 난 나라가 결국 통일이 되었다. 세계에서 분단된 국가 중 아직 남북이 갈린 우리지만 통일에 대한 도전과 열망만큼은 베트남에게서 배워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