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福이 많은 사람인지 모른다. 부친의 직업이 전문직인 약사였고 결혼해서 처음엔 셋방살이를 하셨다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집의 형편도 나아지며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었다. 또한 부친이 워낙 근검절약형이라 경제적인 곤궁함이나 부침이 적었다. 부친이 만일 호탕한 스타일이었다면 크게 부유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시면 모친께서 촌지를 담임선생 양복 주머니에 넣어주시고 해서 학교에서도 기싸데기 등 학대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객지생활을 하며 공부했고 미국에 유학도 갈 수 있었다. 그 정도면 金수저는 아니라도 銀수저는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극빈자라면 어땠을까?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 모친이 파출부로 혹은 시장에서 수선일을 하거나 아니면 쓰레기 치우는 일 등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리는 경우였다면 말이다. 내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일단 공부로 승부를 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등록금 부담이 적은 경찰대학이나 사관학교 혹은 해양대학 등을 나와 군인이나 경찰 혹은 선원이 되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힘들겠지만 일반대학에 진학해 알바라도 하며 공부를 했을 것인데 회계학과나 법학과 등에 가서 세무사나 법무사 등 자격증을 따려했을 것이다. 만일 상고나 공고로 갔다면 일찍 은행이나 회사에 취업해 돈벌이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음악에 빠져 조용필처럼 밤무대에서 가수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떻게 불렀던 곡이 세상에 알려져 뜨게 된다면 그때부터 노래로 먹고사는 일을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혹여나 발을 잘못 들여놓아 옆길로 빠졌다면 드라마 '모래시계'의 '태수'나 '비열한 거리'의 '병두'처럼 학교를 중퇴하고 건달 생활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폭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사채거래가 있는 사람 집이나 가게 등에 가서 겁을 주며 돈을 받아오거나 노점상들을 상대로 매달 자릿세를 받아내는 일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조폭들 간 이권이 걸린 싸움에라도 휘말리면 폭행죄 등으로 전과자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는 극빈자가 아니어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나름 안정된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진정 자신이 혼신을 다해 몰입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글 쓰는 일에 도전하여 몇 날 몇일 글 속에 빠져들며 쓴 글이 어느 날 주목을 받아 명성을 얻게 된다면 作家란 타이틀로 계속 글을 쓰며 살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글의 제목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었을지 모른다.
마가렛 미첼(1900~1949)이란 작가는 3년간 기자생활을 하다 발목상처로 그만둔다. 그 후 1년간 자료조사를 했고 3년에 걸쳐 작업해 완성한 작품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하지만 무명작가의 작품을 읽어줄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유명 신문사의 편집장을 만나 미첼은 자신의 작품을 꼭 읽어 봐 달라고 간청한다. 편집장은 원고를 받기만 할 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기차로 여행을 할 때 하도 지루해서 읽어 본 그 작품에 매료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에 출판된 그 책은 하루에 10만 부씩,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둔다. 1937년 그 책은 퓰리처상을 받았고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그 인기에 힘입어 1939년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영화에서 남부의 귀족으로 전쟁의 폐허 속에서 꿋꿋이 일어선 악착같던 여성 스칼렛 오하라는 名대사를 남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