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변에는 남들보다 고등학교를 1년 혹은 2년 더 다닌 친구들이 더러 있다. 82학번인 나보다 6년 위인 76학번까지는 고교진학도 평준화가 아닌 시험전형이었고 명문고를 진학하기 위해 중학교를 1년 더 다닌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평준화였던 우리 때에도 고1 때 같은 반에는 중학교를 4년 다녔던 친구가 3명씩 있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별로 딴짓을 해 본 일이 없다. 다시 말해 학교와 집 외의 다른 곳에는 잘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再修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재수를 하던 사람들의 생활은 고등학교 때 재수학원 부근 독서실에서 공부하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재학생과 달리 머리를 기르고 학원에서 1년 더 고등학교 과정 공부를 하는 재수생들을 볼 때 들었던 느낌은 갑갑하기만 했다.
실제로 本考査 시절이던 80학번 때까지는 대학 정원이 우리 때보다 훨씬 적었기에 고교 졸업생 중 절반은 재수를 해야 하는 구조였다. 따라서 당시 대학 입시전형이 끝나 재수를 결심하고 학원에서 빽빽하게 앉아있던 재수생들의 모습은 마치 교도소에 갇힌 죄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시절 학원의 종합반 소속 재수생들 가운데는 학원에 앉아 있는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는지 수업 몆 시간을 하고는 담을 넘어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재수생이었다면 어땠을까? 대범하기보다 약간 소심한 편인 나로서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다른 친구들보다 더 컸을 것 같다. 재수를 한 결과가 좋았을지도 미지수이다. 다만 현재 환갑을 앞둔 지금 나이에 보기에는 대학입시의 재수란 게 가지는 의미는 삶의 작은 부분이란 의미로 축소되어 다가온다. 왜냐하면 대학입시 외에도 석박사과정과 박사후과정까지 있는데 각각의 과정별로도 정해진 기간 내에 학업을 마치지 못한 건 재수와 별반 차이가 없다. 또한 사회생활에서도 인생의 再修라 할 일들이 더러 있다.
나는 7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대학을 19세에 입학하여 대학졸업할 때 23세로 최연소였다. 그때 바로 미국유학을 갔는데 그때부터 일이 꼬여 대학원에서 석사하나 마치는데 남들 2배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대학원을 삼수해서 졸업하게 된 것이다. 혹자는 박사를 남보다 훨씬 늦게 받기도 하는데 이 또한 再修, 三修, 四修가 아니고 뭐겠는가?
고등학교 때 학원에서 단과반 강의를 하던 한 영어강사가 수업시간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는 인생의 再修生입니다. 아직 뭘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 채 살고 있어요"였다.
또 한 명의 영어강사도 내가 40대가 되어 우연히 이름을 어디서 보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사회학박사를 받아 부산의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었다. 그 후 총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분과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이 학원강사로 우리 앞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는 대학졸업 후 취업한 회사가 세봉, 제세, 율산이었는데 줄줄이 도산을 했기에 임시 돈벌이 목적으로 학원에서 몇 개월 강사생활을 한 것이라 했다. 그 후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를 하다 미국 유학을 갔다고 했다.
대학입시 재수에서 시선을 확대해 보니 인생에도 다양한 재수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다. 사법고시를 5수 만에 합격한 전직 대통령도 있었고 조선시대 때 무과에 낙방해 재수해서 합격한 장수도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百尺竿頭였던 나라를 구해 내었던 이순신장군이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오로지 성공만 해온 사람이라면 사실 높은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을지 모른다. 높은 자리일수록 알랑한 두뇌보다는 포용력을 발휘하여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까지 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데 있어 과거 한 번쯤 낙방해 본 경험은 값진 자산이 되리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