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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여행의 추억

by 최봉기

2015년 10월 부모님과 형제들이 함께 중국의 길림성의 연길로 가서 이도백화란 도시의 백두산으로 갔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른다. 연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문이란 도시가 있다. 도문은 부친이 어릴 적 10여 년간 사셨던 곳인데 부친은 북한의 고향 함경남도 이원은 갈 수 없지만 어릴 적 추억이 있는 도문은 늘 한번 가고 싶어 하셨다. 도문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북한 남양시가 보인다. 혹자는 도문이란 곳은 연길에 비해 위험하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별로 그렇지 않다고도 했다. 아무튼 당시 팔순을 넘으신 부친이 비교적 건강하셨지만 늘 그렇다는 보장도 없어 늦기 전에 가족여행을 서둘러 추진하였다.


연길 가까운 곳엔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용정이 있고 거기엔 시인이 어린 시절 다녔던 초등학교도 나온다. 첫날은 가이드와 함께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도백화로 이동하였다. 차로 5시간 거리였는데 온통 옥수수밭이었고 가는 도중 중국의 공안이 차를 세워 혹 탈북자 아닌지 확인하였다. 이도백화의 호텔은 연길보다 시설이 못했다. 하루를 묵고 우리는 일찍 백두산으로 향했다.


백두산(2,744m) 입구 주차장에는 곳곳에서 온 차들로 빽빽했고 입장객들이 매표소 앞에 줄을 이었다. 표를 받아서 차례로 미니버스를 탑승하는데 입구인 천지까지 시속 100km 속도로 질주하여 도착하니 사회 지리과 부도에서만 보던 백두산 천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도 비 오는 날이 많아 개인 날 천지를 보려면 3대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나는 무척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백록담보다 몇백 배가 거대한 천지에 도착하니 웅혼한 기운이 느껴졌고 마치 용이 한 마리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천지로 내려가는 곳은 통제되어 내려가지 못했고 워낙 높은 지역이라 10월이지만 바람도 세고 무척 추웠다. 가족들과 인증숏을 하고는 미니버스로 내려왔다. 오전에 붐비던 주차장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입산 시간이 끝나 그랬던 것 같다. 백두산은 북한에서도 올라갈 수 있다는데 정상에서 내려오다 보니 지도에 '김일성 낚시터'란 곳도 있었다. 화산지역이라 산 아래에는 보글보글 끓는 물에 달걀을 삶기도 하였다.


백두산에서 내려와 다시 차로 도문에 돌아왔다. 하루를 묵은 다음날 부친이 과거 다녔던 '도문시제2소학교'를 방문하였다. 교장실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말하니 과거 학교 관련 기록물을 한 아름 들고 들어왔다. 부친이 학창 시절 즈음에 발간한 졸업앨범이었는데 당시 일본인 교장 스즈끼 겐세이를 비롯 담임과 동료 교사의 사진과 얼굴이 나와 있었다. 그동안 과거에 대한 흔적을 찾지 못해 답답해하시던 부친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일부 교사는 창씨개명한 이름, 일부는 조선 이름으로 나와 있었다. 부친 말씀에 의하면 창씨개명한 이름의 당시 담임이란 분은 20대 초반의 젊은 교사로서 황국 시민의 정신이 투철했던 교사였다고 했다. 그 시절엔 교실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경우 벌을 받았다고 한다.


앨범에는 당시 운동회 때 사진도 있었는데 모래판에 윗옷을 벗고 겨루는 모습이라 씨름 시합인지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스모 시합이었다. 당시 학교는 신축 건물 공사로 학생들이 벽돌을 나르기도 했다는데 과거 건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고 살던 집도 학교 주변에 있었다지만 그땐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멀리 보이던 산은 과거에 나무가 많았다는데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가기 한참 전 1980년대에 그 학교 출신 재미교포가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말을 해주기도 했다.


우리가 들렀던 도문의 두만강은 하류지만 비가 적어서인지 마치 개천처럼 물도 별로 없었고 건너편 북한 남양시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강가에서 올라오면 동산 위에 공원이 하나 있었는데 부친이 어린 시절엔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부친이 어린 시절에 살던 도문과 백두산이 있는 이도백화란 곳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스케치해 보았다. 지리과 부도에서나 보던 백두산을 가서 보며 그 웅혼함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운무 속으로 햇볕이 쏟아지는 천지를 볼 때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선뜻 들기도 했다.


부친이 어릴 적 10여 년간 사시던 도문을 둘러볼 때엔 스스로 부친이 살아계실 때 마지막으로 뜻깊은 가족여행을 하게 된 것이라고 느꼈다.


부친은 한국전쟁 때 월남하셔서 그리운 고향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체 70여 년을 타향 부산에서 사셨지만 어릴 적 사셨던 도문에 가서 그나마 꿈속에서나 그리던 과거 추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실향민의 자녀로서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고향이란 곳은 남녀노소 그리고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곳이다. 60년간 약사로서 생활하신 부친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통일이 되어 고향에 가면 우리 고향 사람들한테는 약은 돈 안 받고 그냥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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