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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호남인이었다면?

by 최봉기

나는 태어난 곳이 부산인데 부친은 고향이 함경남도 이원이고 모친은 경남 의령이다. 나더러 누가 부산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니란 말은 못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도 약간 애매하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살던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다. 그중에서도 호남에서 온 인구와 이북에서 내려온 인구가 각각 약 1/4일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북이 고향인 사람은 한국전쟁 때 내려온 피난민들이지만 호남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이주한 경우이다. 부산이란 도시가 매력적인 이유는 여느 도시에 비해 텃세가 없어 누구나 놀지 않고 일하면 먹고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점이다.


어릴 적 내가 사는 동네에 호남에서 건너온 가정이 하나 있었다. 그 집에 나 또래와 내 동생 또래가 살았기에 종종 놀러 가기도 했는데 부모들 말투나 생활 방식을 보면 경상도 가정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호남 가정의 경우 여자들의 생활력이 매우 강하고 남편에게 순종을 넘어 떠받드는 정도여서 가장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권위가 섰다.


호남인이라도 호남에서 태어나서 생활하는 호남인과 객지로 이주한 호남인들은 약간 차이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객지로 이주한 사랑들은 자기 한 몸 가누기도 어려워 상대방을 배려할 정도의 여유가 없다. 따라서 혹여나 처신을 잘못할 경우 호남사람 전체가 매도되기도 한다. 가령 처음 거래나 인간관계에서는 믿을 만하게 처신을 하고는 막상 믿고 돈을 빌려주거나 하면 남 뒤통수를 치는 경우인데 이런 일은 호남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객지에 이주한 경상도 사람도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서울 등 객지생활에서 대구 인간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고 호남 사람에게는 오히려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 따라서 "전라도 사람은 못 믿을 인간"이란 식의 말은 근거가 없고 주관적인 것이기에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만일 내가 호남인이었다면 어땠을까? 호남출신이라는 이유로 살면서 설움을 받을 일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60~70년대까지만 해도 호남사람이 경상도로 올 경우 방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1971년 대선 때 야당후보로 호남출신 김대중이 나왔을 때 영호남 간 지역적 갈등이 무척 심했는데 그걸 조장했던 게 다름 아닌 경상도 출신 권력자들이었다. 그 이유는 표가 지역으로 갈리면 지네들한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 때 알고 지냈던 형벌되는 분은 고향이 전남 순천으로 전남 광주의 명문 광주일고를 다니다 '학생의 날' 시위 주동자로 학교를 졸업하지도 못하였다. 그 후 여기저기를 떠돌다 검정고시로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대학을 입학해서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나에게 정신적 고충을 털어놓곤 했다. 결국 넋두리만 하다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지금도 재주가 아까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타고난 유머감각을 가진 달변가였고 머리에 든 지식도 어지간한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소동파의 '送詩'를 한자로 써서 풀이를 해준 적이 있다. 그 시는 오랜만에 벗을 만나 밤을 새워 잔을 기울이면서 술이 취했다 깼다를 반복하며 새벽이 되어 배를 타고 떠나는 벗을 산 위에서 바라보며 쓴 詩이다.


최근에는 친한 친구 하나가 전남 광주의 한 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있어 종종 그를 만나 전남의 목포나 해남, 여수, 담양, 보성, 강진 등과 주변 도서를 여행할 일이 있었다. 곳곳에 수려한 경치와 고유한 먹거리가 있고 아기자기한 저마다의 특성이 있어 여행의 만족도가 꽤 높았다. 영남사람들이 호남을 또한 호남사람들이 영남을 여행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서로의 문을 활짝 열고 자주 왕래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호남이란 지역은 과거에 고립되어 있었는지 몰라도 이제는 호남에서도 대통령이 나왔고 지역차별이란 말이 별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한때 TV드라마에서 악질 건달들은 죄다 전라도 말씨일 때가 있었다.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분을 참지 못하며 "TV드라마를 보면 깡패는 전부 전라도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깡패들 말투가 경상도말로 바뀌었던 것 같다.


백제가 당나라라는 외세를 등에 업은 신라에 의해 몰락했고 그 이후부터 전라도란 지역이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며 지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후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지며 지역적인 특성상 호남에 관심이 모아지기도 하였다. 영호남이 힘을 모아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넘어 우주로 도약할 날이 오길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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