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영화관에 가면 악역만 맡는 배우들이 있었다. 국내 배우 중엔 고인이 된 '허장강'과 '독고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약자들을 괴롭히는 악당이나 반공영화에서는 인민군 혹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형사 등이 그들의 주요 배역이었다. 1972년 시청률 80%의 '여로'라는 국민드라마에는 '김달중'이란 희대의 惡役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앞잡이 겸 사기꾼으로 나와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고 해방 후에도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버젓이 사업가가 되어 똑같은 짓을 한다. 여로가 그토록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이유는 모름지기 시청자들이 그 악역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며 결국 善이 惡을 이기는 통쾌한 순간을 보려 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는 특히 교훈을 목적으로 할수록 의로움을 부각하기 위해 악역의 역할이 더욱 부각된다. 다시 말해 더욱 악질적인 역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빛과 어둠'의 관계일 수 있다. 만약 세상에 빛만 있고 어둠이 없다면 빛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바꿔 말해 세상에 어둠만 있고 빛이 없다면 어둠의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악랄한 악역의 跋扈속에서 의인의 존재는 더욱 부상하는 것이다.
성서는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갈라놓는 사탄을 악의 근원으로 가르친다. 만약 惡의 화신인 사탄이 없었다면 인간은 에덴동산이란 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렸을 것인데 그전까지 불행을 경험해 보지도 않고 그게 행복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결국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온갖 불행이 시작되었다는데 그러한 불행이 있었기에 그 이전이 행복이었음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학창 시절 교사들 가운데에는 회초리를 들며 惡役을 담당하던 분들이 계셨다. 그 회초리를 '사랑의 매'라고 불렀다. 환갑을 앞둔 현재 당시 간혹 체벌 대상자였던 사람의 눈으로 보면 책임감과 관심이 나름 있었기에 들었던 매였겠지만 그걸 사랑의 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體罰에는 감정이 완전히 배제되기 어려운데 그리 되면 매가 한순간 학대의 수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교사란 직업인도 따지고 보면 학교에서 상부로부터는 지시와 통제를 받기에 강자라기보다 약자에 가까운데 권위에 의존하던 교사들에게 있어 학생이란 또 하나의 약자들은 자신들의 불만과 짜증을 해소할 유일한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한 걸 꾸짖거나 매를 들지 않고 방관만 했다고 한다면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기에 體罰의 의미를 폄하할 수만은 없기도 하다.
교사 외에도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惡役들이 도처에 있다. '경찰관'과 '기자'들이 그러하다. 나는 몇 년 전 건널목이 아닌 곳을 지나가다 단속 경찰에 의해 적발되어 범칙금청구서를 받게 되었다. 순간 발끈하여 대어 들었는데 경찰관은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불쾌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건널목이 아닌 곳은 건너지 않게 되었다.
사회에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사람들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같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또 하나의 직업이 바로 기자이다. 감추고 싶은 개인적인 비리가 어쩌다 언론에 폭로될 경우 그들은 더 이상 대중들 앞에 설 수 없게 되며 곧장 사회에서 매장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사회적으로 악역을 맡게 된다면 어떨까? 남들이 별 좋아하지 않는 일에 종사하며 하는 일에 회의감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직업인들은 사회적인 편견으로부터 보호되고 한편으로는 존경을 받을 충분한 이유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속성상 악역이 없으면 세상은 갈수록 더럽고 무질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러한 일을 수행한다는 자가 뇌물을 받거나 공정하지 못한 처신을 할 경우 사회는 한마디로 썩어버리는 것이기에 이 경우에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이 내려져야 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