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개봉된 송광호 주연 영화 '택시 운전사'는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국내 20편 영화 중 하나이다. 영화에서 1980년 5월 당시 택시운전사 만섭은 단지 턱없이 돈을 많이 준다는 얘기에 혹해 독일인 기자 피터를 태우고 서울에서 광주까지 달려갔는데 광주의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분통을 터뜨리며 피터의 멱살을 잡고는 혼자 광주를 떠나 버리는데 불현듯 생각이 바뀌어 다시 핸들을 광주로 돌려 살벌한 현장을 사진에 담는 피터를 도와주며 함께 극적으로 탈출한다.
나는 그 영화를 볼 때 택시운전사란 직업에 대해 나름 친근감을 가지고 관람하였다. 그 이유는 십여 년 전 나도 재미 삼아 용돈벌이 목적으로 두어 달 동안 대리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를 운전해서 몇 푼 번다는 건 힘도 많이 들지 않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보기보다는 짜증스러운 일이다. 차에 타는 사람들은 면면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친절하게 내비게이션까지 켜주며 운전자를 배려해 주는 반면 어떤 이는 음주 때문에 피곤해서 그렇겠지만 목적지만 떨렁 얘기하고는 앉아서 자기 바쁘다. 그러다 혹연히 길을 잘못 들어 깨워 물어보기라도 하면 온갖 짜증을 부린다. 간혹 운전자가 길을 잘못 들어 차가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경우 콜을 한 사람 입장에서는 괜히 기름값만 버리고 늦게 집에 도착하니 고성을 낼만도 하지만 운전자는 내색은 못하고 속만 부글부글 끓기도 한다. 사실 나는 경제사정이 그다지 궁색한 편은 아니었기에 그럴 땐 차라리 차에 탄 인간을 주먹으로 몇 대 날려 버리거나 아니면 술 취한 인간이 탄 차를 고속도로 한편에 세워놓고 그냥 내려버릴까 싶다가도 "누가 시켜서 시작한 일도 아닌데" 싶어 웃으며 몇 푼 받고 차에서 내리곤 했다.
2013.12월부터 두 달간 저녁 5시간 정도 핸들을 잡았는데 때가 연말이라 콜이 제일 많았던 날은 하루에 9건씩이나 되었고 일평균 4~5건 콜정도는 받아 운전을 했다. 내차로 다닐 때엔 가까운 곳이나 왕래했지만 콜을 받고 가는 곳은 목적지가 넓게 하남이나 남양주 혹은 파주 등 동서남북 상하좌우가 따로 없었다.
몰았던 차도 벤츠나 BMW 같은 최고급 외제차부터 수동기어 트럭까지 수십 종은 되었다. 차에 동승했던 사람들의 면면도 사업가에서 술집 여종업원, 건설 종사자, 신문기자, 고위 공무원, 은행지점장, 자영업자 등 각양각색이다 보니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이기도 했다.
인부들을 거느리고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는 이가 했던 말이 나이가 오십이 된 사람은 '노가다'를 하러 와서도 몇 달을 못 버티고 그만두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다. 2년 정도의 현장 경험은 있어야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지만 열 살 이상 아랫것들이 '영감, 영감'하고 부를 때 생기는 비참함은 공사판을 더 이상 제2 인생의 대안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남녀가 주점 등에서 함께 타는 경우 호텔로 향하기도 하고 남녀가 함께 술이 만취해 뒷 좌석에 앉아서 운전자도 아랑곳 않고 줄곧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경우 야심한 시간 피로를 잊게 하는 특급 눈요기가 따로 없었다. 서울 올림픽대로의 일부 구간은 평균 100km 이상 속도의 차들이 좁은 간격을 유지하며 달리는데 운전 고수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은 등에 식은땀과 함께 몇 푼 벌려다 황천길로 갈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영화 이외에도 택시운전사가 주인공이 된 책이 있다. 1996년에 출간된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이다. 그 책은 30만 부의 판매를 기록했던 베스트셀러이다. 저자인 홍세화는 1979년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주재하던 중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에 망명하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정부로부터 사상자유 침해로 인한 난민으로 인정받아 이주노동자로 택시운전사로 일하며 경험한 걸 바탕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그 후 그는 2002년 귀국하여 언론, 출판, 교육, 사회활동 정치 등 제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렇듯 택시나 대리운전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책이나 영화로 제작될 좋은 소재가 되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가 어린 시절이던 1960~70년대에 택시는 비용이 버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아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또한 그때는 자가용이 귀할 때라 버스가 아닌 소형차에 탄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하다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었다. 내가 대학시절이던 1980년대에 택시 운전사들은 어지간한 언론인 수준이었다. 학력 정도는 잘 모르지만 사회 각종 이슈에 대한 식견이 날카로울 뿐 아니라 나름 훌륭한 대안제시 역량까지 가진 걸로 기억된다. 그 이유는 하루에도 온갖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수십 명의 사람과 동승하여 이동하는 동안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재 국회에서 300명의 여야의원들이 모여 토의한다는 걸 보면 한심할 때가 있다. 식견부족 때문인지 정책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보다 개인 사생활 혹은 상대 당의 비난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면 국민 혈세를 허비하며 헛소리나 하지 말고 시간 날 때 대리운전이라도 하면서 용돈도 벌고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를 국정에 반영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국회가 현재보다는 소모적인 정쟁이 적은 생산적인 입법기관이 되리라 생각된다.
마음의 고향을 찾아서 (56) '만일 내가 택시드라이버라면?'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